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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1155
한자 義倉址
영어의미역 Uichang Righteous Granarie Site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연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창고 터
소재지 주소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지도보기
소유자 파평윤씨 노종파 문중

[정의]

조선 중기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에 있던 파평윤씨 노종파 의창지.

[개설]

윤순거이이(李珥)의 석담사창지법(石潭社倉之法)의 예에 따라 불의의 재난과 일가집의 궁핍에 대비하는 대비책으로 의창(義倉)을 창설하였다. 즉 의창제를 문중 운영에 도입한 것이다.

[변천]

윤순거는 문중의 선산과 재실의 운영, 묘사를 위하여 마련된 재정 조치로 의전을 마련하였다. 처음 의전(義田)은 윤순거가 5방파의 각 집에 별도로 논 7마지기를 내주고 그 토지에서 받는 예납곡(例納穀)으로 기본 자산을 삼았다. 초창기에는 각 집에서 성실하게 예납을 서둘러서 비축량이 많아 부상(賻喪)에는 이불 2벌을 보낼 수 있었고, 급한 출산에도 여러 가지 쓸 밑천과 양식을 넉넉히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의창의 규례가 활발하게 시행되었고, 이후 40년은 모범적으로 시행이 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각 5방파 집의 생활이 점차 어려워지면서 각자 내야 할 예납을 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전에서 나오는 수입도 부족하여, 급기야 40여 년 만에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의전의 운영상에 문제가 발생하자 종중회의에서 의전을 비청(碑廳)의 자금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비청 사업 역시 여러 해 지연되고 종족들은 더욱 번성하여 많아졌으나 반면 가난하여 굶는 자도 많았다.

더욱이 1799년(정조 23)과 1802년(순조 2)에 큰 기근이 있었다. 이에 윤광저(尹光著)와 윤광형(尹光炯) 등이 구휼사업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윤광저·윤정규(尹正圭)·윤광안(尹光顔)·윤광보(尹光普)의 논의와 주도로 노성현 내의 18개 종계와 서울과 각 고을의 수령, 넉넉한 후손들이 돈과 곡물을 출연하여 의창을 재건하였다. 그 후 의창은 음덕과 운영자의 선정으로 소기의 목적대로 운영되어 왔으나 일제강점기로 들어서면서 일본의 곡물 약탈로 다시 어려워졌고, 1949년 농지개혁법 시행으로 그 기능을 잃고 훼철되었다. 당시에 대형·중형 창고 각 1동과 고직사가 있었다고 한다.

[현황]

유허비의 바로 뒤편 민가 터에 의창지가 있었는데, 1999년 문중에서 이곳에 의창유허비를 세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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