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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1150
한자 尹烇神道碑
영어의미역 Spirit Path Monument of Yun Jeon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조성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신도비
건립시기/일시 조선 후기
관련인물 윤전
높이 171㎝
너비 68㎝
소재지 주소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지도보기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에 있는 조선 후기 윤전의 신도비.

[개설]

윤전은 파평인으로 윤창세의 아들이고 팔송 윤황의 아우이다. 성혼의 문인으로 1610년(광해군 2) 문과에 급제하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을 피하여 왕을 공주까지 호송하여 공조정랑이 되었다. 정랑을 지내다가 필선이 되었고, 병자호란을 만나 강화도에서 전사하였다.

[건립경위]

윤전은 사후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충헌의 시호를 받았는데, 이에 후손들이 1821년(순조 21) 윤전 신도비파평윤씨 선영에 세우게 되었다.

[위치]

노성면소재지에서 노성초등학교 가는 길로 2㎞ 정도 가면 병사리저수지가 나오고, 저수지를 끼고 들어가면 파평윤씨 세장지가 나온다. 윤전 신도비파평윤씨 선영 하단에 윤진 신도비, 윤순거 신도비와 함께 서향으로 세워져 있다.

[형태]

조선 후기 신도비 형식인 농대석 위에 오석의 비신이 세워져 있고, 지붕돌[가첨석]을 갖추고 있다. 농대석과 비신과 지붕돌이 적당한 크기로 잘 어우러져 있어 단아한 모습이다. 비문은 이시수가 짓고 비문과 전액의 글씨는 신작이 썼다. 비신의 크기는 높이 171㎝, 폭 68㎝, 두께 38㎝이다.

[금석문]

신도비 전액에 ‘증이조판서시충헌후촌윤공신도비명(贈吏曹判書諡忠憲後邨尹公神道碑銘)’이라고 쓰고, 비문에 “유명조선국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오위도총부도총관세자좌빈객시충헌행통훈대부세자시강원필선겸춘추관편수관윤공신도비명병서(有明朝鮮國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慶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世子左賓客諡忠憲行通訓大夫世子侍講院弼善兼春秋館編修官尹公神道碑銘幷序)”라고 쓰인 비제가 있다. 찬자는 ‘대광보국숭록대부원임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이시수찬(大匡輔國崇祿大夫原任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李時秀撰)’, 서자는 ‘통정대부승정원우부승지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신작서병전액(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申綽書幷篆額)’이라고 찬서자를 새기고 다음 비문을 기록하였다.

“우리 순조 임금 7년 정묘년에 호서 유생들이 상소하여 고 충신 충헌공 윤전의 부조지전을 청하니 하명하여 조정에서 상의케 하는데, 신수가 그때 재상으로서 왕에게 의견을 말하기를 ‘부조는 소중한 법도이어서 충절이 탁월한 이에게 많이 특별히 허가한 일이 있습니다. 강화도에서 순절한 여러 신하가 거의 다 은전을 입었으나 충헌공 윤전의 충성과 높은 절개는 실로 여러 신하와 다를 바 없으니 마땅히 여러 신하가 입은 은전을 공에게 베풀어야 합니다’라 했다.

이에 임금의 명으로 을묘년에 호조좌랑으로 옮기니 여러 소인배들이 다시 전일의 원한을 갚으려고 공을 관원 명부에서 삭제하였다. 공이 이때부터 관직에 나가기를 단념하고 물러나 시골에 내려와 생활한 지 8년 되던 해에 인조가 중흥하니 사람들이 공이 높은 벼슬길에 나갈 것이라고 말하였다.

예조정랑이 되고 정묘 봄에 북쪽 오랑캐가 쳐들어와 공은 사계 선생이 호소사가 되어 나갈 때 종사관으로 여러 군과 읍을 돌아다니며 군사와 양곡을 모았다. 병자호란 중에 청나라 사람이 세자빈을 위협하여 남한산성으로 가라하니, 그 뜻은 행재 조정에 과시하려는 것이다. 양덕립이 공에게 함께 가기를 청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포로가 되어 굴욕을 당할진대 차라리 여기서 죽으리라’ 하고 나서지 않았다.

25일에 송공이 먼저 스스로 목을 매어 순절하였고 이공이 뒤를 이으니 공이 시신을 안고 크게 통곡하고 그 노끈으로 목을 매니 주위에서 사람들이 풀어주었다. 26일 청나라 군사가 성중의 사람을 다 몰아내니 공이 차고 있던 칼을 꺼내어 스스로 찔렀으나 죽지 않으니 분하게 여기며 적을 꾸짖어 말하기를 ‘내 칼이 짧아서 능히 목숨을 끊지 못하는 것이 한인데 어찌 너희를 쫒겠느냐’ 말하고 적에게 살해되었다.”

[현황]

병사리 파평윤씨 문중에서 잘 관리하고 있고, 비신의 석질이 우수하여 옛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중기 인조의 등극과 이괄의 난 및 병자호란 때 윤전의 충의를 신도비문을 통하여 알 수 있어 그의 활동 사항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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