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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학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0848
한자 夜學運動
영어의미역 Night School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은지

[정의]

일제강점기 이후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서 전개되어 온 농촌계몽운동 또는 문맹퇴치운동.

[개설]

야학은 야간에 수업을 하는 비정규적 교육 기관을 말하며 야간에 운영되는 정규적 교육 기관인 야간학교와는 구별된다. 야학은 일제강점기에 크게 발달하였으며 이 시기의 야학은 식민지교육정책에 따른 교육 시설의 부족과 생활의 빈곤으로 정규학교의 취학이 어려운 시기에 민중들에 대한 초등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야학은 관립야학과 사설야학으로 대별된다. 이중 관립야학은 행정당국이 일본어 보급을 목적으로 공립 보통학교의 부수 사업으로 운영하였다. 그리고 사설야학은 노동자·농민·부녀자 등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농촌계몽이나 문맹퇴치를 위한 교육이며 야학운동이라 함은 주로 이러한 성격의 교육운동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서도 이러한 야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흙」, 「상록수」, 「고향」 등 일제강점기에 출간된 대표적인 농촌소설을 읽어보면 야학운동이 중요한 소재로 많이 활용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당시에 야학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반증하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당시 문헌자료에 기초한 통계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 야학은 대략 4만여 개 정도였으며 야학에서 교육받은 연인원은 대략 30만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된다.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에 농촌사회를 중심으로 야학운동이 성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우선 정규 교육 기관의 월사금제가 추수기에 대부분의 소득이 발생하는 소작농민들의 소득구조로 미루어볼 때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년 3학기제 내지 2학기제와 통학제가 농번기에 아동노동마저도 총동원해야 했던 소작농민들에게 있어 적응하기가 대단히 곤란한 제도였을 뿐만 아니라, 정규 교육 기관의 교육내용도 소작농민들의 실생활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와는 달리 야학의 경우 농한기에 무료로 교육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교육 내용도 실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변천]

논산 지역의 야학운동은 1920년대 초반부터 집중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이 시기의 야학운동은 주로 교회나 지역유지들이 주도하였다. 그리고 1921년 당시 운영되고 있던 대표적인 야학으로는 강경읍 황금정에서 설립된 부인야학, 강경청년회가 운영하던 노동야학, 강경상애회와 청년간친회가 운영하던 야학, 강경 형평사가 설립한 야학, 양촌면 양촌리에 설립된 수양야학과 청년야학회, 성동면 삼호리 야학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후로는 논산 지역 야학운동의 주체가 서서히 변화됨과 더불어 청년회, 농민조합, 노동조합 등과 같은 관련 지역의 사회운동 단체들이 야학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논산 지역의 야학은 대중과의 접촉을 위해 이들 사회운동 단체들이 운영하는 가장 보편적인 대중사업의 하나였다. 특히 1929년에 논산 지역에서 활동하던 야학들의 경우 비상설적으로 운영되던 마을 단위의 소규모 야학들도 많았지만 비교적 규모가 크면서 활동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야학들도 많았다.

이처럼 각 사회운동단체가 주도하는 야학운동이 활기를 띠어가자 일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논산 지역의 야학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1931년 10월 논산경찰이 10년의 역사를 가진 논산노동야학을 금지시킨 것을 들 수 있다. 그 외에도 1930년대에 들어 야학에 대한 인가제가 실시되면서 여러 사회운동 단체들이 주도한 민중야학들이 대부분 문을 닫았다. 대신 1932년부터 관제농민운동인 조선농촌진흥운동이 실시되면서 논산 지역의 농촌에는 마을진흥회가 주도하는 많은 관제야학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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