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0680
한자 百濟
영어의미역 Baekje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이현숙

[정의]

삼국시대 백제 관할의 논산 지역의 역사.

[개설]

백제(百濟)는 고구려·신라와 함께 한국 역사에서 삼국시대라는 각축전을 전개한 고대국가의 하나로 부여 계통의 여러 이주민 세력이 한강 유역의 선주민과 결합하고 마한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온조왕을 시조로 하여 B.C. 18년 현재의 한강 하류인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면서 시작되었다.

475년 고구려의 침략으로 인해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하였으며, 538년에는 다시 사비(부여)로 천도하여 공식 국명을 남부여(南扶餘)로 하였다. 이후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고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 따라서 백제사의 시대 구분은 천도를 기준으로 한성시대(B.C. 18~A.D. 475), 웅진시대(475~538), 사비시대(538~660)로 구분하기도 한다.

충청남도 지역은 백제웅진천도와 사비천도로 백제 역사의 중심 지역의 하나로 등장하였다. 특히 천안·아산·연기 등과 더불어 논산 지역도 한성도읍기에서부터 사비도읍기에 이르기까지 백제의 영향력 속에서 문화의 지속적인 변화와 발전이 이루진 지역이었다. 최근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조사·발굴 과정에서 이들 지역에 대단위의 백제 관련 유적이 존재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산성·고분·생활유적 등이 많이 확인되고 있다.

[한성시대]

원삼국시대의 마한 54국 중 논산 지역을 관할한 소국은 아직까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가장 가까운 진잠에 신흔국(臣釁國)이 위치하고 있어 이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논산 지역은 남부의 전라도 지역으로 진출하는데 있어서 지리적 요충지인 관계로 한성시대의 백제가 논산 지역에도 일정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논산 지역에서 조사·발굴된 자료 가운데 재지세력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인 논산 모촌리 유적의 존재로 미루어 볼 때 한성시대의 백제와 논산 지역이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문화적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웅진시대]

논산 지역이 백제의 직접적인 통치 체제 하에 편입된 시기는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475년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고고학 자료 가운데 성동면 정지리원북리 등지에서 조사된 백제시대 유적에서 백제의 대표적인 중앙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삼족토기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며 재지세력의 무덤으로 판단되는 연산면 표정리 고분군양촌면 모촌리 고분군도 있다.

특히 모촌리의 백제고분군 내에서는 재지세력의 수장급 무덤에 해당하는 5호 수혈식 석곽묘의 한쪽에 백제 중앙양식의 병형토기와 개배 등이 부장되어 있는 모습 등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당시 논산 지역이 백제의 정치적 영향력 하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지만 백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논산은 왕도인 공주와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부 지역으로 진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교통로였다. 또한 연산에서 양촌으로 연결되는 평야 지대는 옥천이나 금산을 통해 신라와도 교류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리적 중요성과 왕도였던 공주와의 근접성으로 미루어 논산일대는 백제의 직접통치 하에 놓여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웅진시대에 논산 지역은 중앙의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어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에 의해 다스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비시대]

백제사에 있어서 논산이 그 존재를 분명하게 나타낸 시기는 사비로 천도한 이후이다. 사비천도로 인하여 논산 지역은 백제의 신라 진출뿐만 아니라 신라의 백제 진출을 방어하는 가장 중요한 요충지가 되었다. 따라서 논산에는 백제 지방 통치 체제인 방군성제의 5방성 가운데 하나인 동방성(득안성)을 비롯한 왕도의 동쪽 방비를 위한 백령성, 신흥리 산성, 황화산성, 모촌리 산성, 청동리 산성 등 많은 산성이 축조되었으며 이들 산성은 사비천도 이후 논산의 지리적 중요성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백제시대 논산 지역은 3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들 행정 단위가 언제부터 성립되었는가는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대개 지방 통치 체제가 새롭게 정비되는 사비기로 판단된다. 『삼국사기』지리지에 나타난 백제시대 논산 지역과 관련된 행정구역을 살펴보면 남부 지역은 덕근군, 동부 지역은 황등야산군, 북부 지역은 웅진의 열야산현에 편제되어 있었다.

그런데 덕근군은 완산에 소속된 군이었으며, 은진면 일대가 중심지였던 것으로 파악되지만 익산과 완주의 일부도 포함되었다. 황등야산군의 중심은 연산 지역이었으며 대전과 금산의 일부가 동일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그리고 열야산현은 노성면 일대로 비정되는데 공주의 직할 지역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따라서 기록을 통해 볼 때 현재의 논산 지역은 덕근군황등야산군 등 2개의 군과 웅진 열야산현의 일부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비시대 논산 지역의 문화적 특징을 살필 수 있는 고고 자료로는 가야곡면 육곡리 고분군이 있다.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논산 지역에서는 재지세력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수혈식 석곽묘가 다수 분포하고 있는데, 육곡리 고분군에서는 은제화형관식이 출토되어 백제의 중앙관제에 편제된 관료계층의 존재가 확인된다.

고분의 형식도 백제 중앙에서 사용된 고임식의 횡혈식 석실분일 뿐만 아니라 출토유물도 모두 중앙의 것에 해당된다. 특히 은제관식은 당시 관제규정에 의해 1품인 좌평부터 6품인 나솔에 해당하는 고위 관료층만 착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육곡리 고분군은 중앙관제에 편제된 고위 귀족의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시 논산 지역이 중앙의 직접 지배하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황산벌 전투]

백제사에서 논산이 특히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백제 역사상 최대의 격전이자 국운을 걸었던 황산벌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황산벌 전투는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대항하여 벌인 최초의 전투이자 도성 사비를 방어하기 위한 마지막 전선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결국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백제는 멸망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황산벌 전투와 관련해서는 3영(三營)의 설치 지점과 전투 지역의 위치, 계백의 충의정신 등에 대한 검토가 주로 이루어져 왔으며, 그 전투 지역이 논산 연산 일대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현재 황산벌 전투가 벌어졌던 논산 일대에는 이와 관련된 많은 설화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의의와 평가]

고대국가 백제와 논산 지역과의 관계는 백제의 태동과 더불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초기에는 논산 지역이 배후 지역으로 존재했으나 백제의 팽창과 더불어 중요 지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웅진천도를 계기로 백제의 최고의 요충지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 사비천도로부터 황산벌 전투에 이르기까지 신라를 비롯한 남부 지역과의 교통로적 입지가 강조되면서, 논산 지역은 백제문화의 진정한 터전으로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