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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0193
한자 三一運動
영어의미역 The March First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은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3월 10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19년 4월 4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옥녀봉 지도보기
관련인물/단체 엄창섭|강금옥|추병갑|곽성진|석광열|박금봉|정기섭|한규섭|고상준

[정의]

1919년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서 발생한 독립만세 시위 운동.

[개설]

논산 지역에서의 3·1운동은 3월 10일부터 4월 4일까지 일어났다. 이 시기에는 크고 작은 만세 시위가 빈발하였으나 큰 시위는 네 차례에 걸쳐 발생하였다. 처음 발생한 시위 운동은 3월 10일 강경 옥녀봉에서 엄창섭·강금옥·추병갑·곽성진·석광열·박금봉·정기섭·한규섭·고상준 등 500여 명의 주민이 참여한 만세 시위 운동이었다. 두 번째로는 3월 12일에 논산읍에서 손필규·이백순·이근옥·김태오 등 1,000여 명의 주민이 참여한 시위가 있었다.

세 번째로는 3월 20일 채운면에서 송재기·이근오·이근석·이봉세 등 1,000여 명의 주민이 참여한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마지막으로 4월 4일 강경읍광석면 등지에서 이충규·박용진 등 500여 명의 주민이 참여한 시위가 일어났다. 논산 지역의 3·1 만세 시위 운동 과정에서 염상오·박용진·김태오·이충규 등이 경찰의 실탄사격, 혹은 고문으로 살해되었다.

[목적]

3·1만세운동은 궁극적으로 일본에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범국민적으로 진행한 운동이고, 논산 지역에서의 만세 운동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경과]

3월 10일에 발생한 강경 시위는 군산 영명학교 학생인 강금옥으로부터 독립운동을 하자고 권유받은 창영학교 교사 엄창섭 등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엄창섭 등은 3월 6일 창영학교에서 고상준·추병갑 등과 함께 시위를 모의한 뒤, 3월 9일 학교에 모여 태극기를 제작하였으며, 이튿날인 3월 10일 오후 3시 옥녀봉에 집합하여 5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한편 곽성진 등은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우들과 같이 서울 탑동공원 만세 시위 운동에 참가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서 석광열·박금봉·강세형 등과 만세 시위를 모의하다가, 3월 10일 엄창섭 등이 주도한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다음으로 3월 12일에 전개된 논산 시위는 손필규·김태오·김태호·이백순·이근옥 등이 오후 3시 반경 100여 명의 청년학생들과 함께 강경에서 논산읍내로 향하며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논산읍내로 시위대가 진입하자 잠깐 사이 1,00여 명 규모로 늘어났다.

3월 20일에 발생한 채운면 시위는 송재기·이근석·이근오·이봉성 등이 주도한 운동이다. 이들은 3월 16일부터 3월 18일에 이르는 기간에 충청남도 논산군 채운면 심암리에 있는 이근석 가택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여 태극기 300여 매를 제작하는 등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이들은 3월 20일 강경 장날을 기하여 먼저 심암리·화정리 주민 70여 명을 규합하여 시위대를 형성한 뒤, 시장으로 진출하여 수백 명의 군중을 규합할 수 있었다. 이들은 오전 10시경 옥녀봉에 올라 군중을 선동한 뒤 여세를 몰아 시장 진출을 시도하였다. 끝으로 4월 4일에 발생한 강경읍광석면 시위는 수백 명의 군중이 참여한 만세 시위였다. 4월 4일 이충규 등은 5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몽둥이 등으로 일본 경찰에 대항하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결과]

3월 10일에 발생한 강경 시위 책임자로 붙잡힌 정기섭·한규섭 등이 옥고를 치렀다. 3월 12일에 발생한 논산 시위에서는 경찰이 시위 군중을 향해 발사한 권총에 염상오와 염승필이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또한 강경읍광석면 시위에서는 이충규박용진이 헌병이 쏜 실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또한 4월 4일 광석면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에서도 약 200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하던 박용진천동리 부근에서 야만적인 일본 헌병의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는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죽거나 다치고 감옥에 갇혔다.

3월 20일 채운면 시위를 주도하다 옥고를 치른 송재기는 1926년 동아일보 대전지국을 경영하였으며, 야학을 세워 교육사업에도 종사하는 등 민족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근석 또한 1923년 3월부터 1925년 2월 사이에 논산군 채운면 심암리 채운학원을 설립하여 주민들의 문맹 퇴치와 청소년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으나, 일제에 의해서 강제로 폐교되고 말았다. 이근석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32년 3월 논산군 부적면 신풍리에 신풍학원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의 항일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는 해방 후에도 공민학교를 설립하여 후학 교육에 헌신하였다.

[의의와 평가]

전국적으로 발생한 3·1 만세운동에 논산시도 참여한 운동으로서 많은 순국선열들이 나왔으며, 추후에 공훈을 받은 독립운동자들도 많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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