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융을 시조로 하고 서정수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논산시 세거 성씨. 부여서씨는 의자왕의 아들 서융(徐隆, 부여융이라고도 함)을 시조로 하고 있다. 서융은 660년(의자왕 22)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멸망한 뒤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에 끌려갔다. 당나라 고종은 서융에게 서씨의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냈다고 전한다. 이후 세계(世系)는 알 수 없으나, 서융의 원손으로...
1400년대 후기에 이 지역과 인연을 맺은 부여서가는 시간이 흐를수록 문중활동을 강하게 펼치며 자신들의 전통과 사회적 지위를 고양시키기 위해 다양하고도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에서도 1867년 이루어진 행림서원의 건립은 이런 그들의 노력에 가장 큰 정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유서 깊은 문중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문중사람들의 규약인 종약(...
조선 중기 논산 출신의 문신. 본관은 부여(夫餘). 자는 군수(君受), 호는 만죽(萬竹)·만죽헌(萬竹軒). 아버지는 서진남(徐震男)이고, 어머니는 직제학 이약해(李若海)의 딸로서 광주이씨(廣州李氏)이다. 서익은 1554년(명종 9) 13세 때에 향시에 장원하고 1564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병조좌랑, 이조좌랑, 교리, 사인을 역...
부여서씨 집안의 대표적 인물이자 육곡리 봉례공파 후손들의 자랑인 서익 선생은 논산에 이거해서 뿌리를 내리고 대표적인 큰 가문으로 성장하는데 발판을 마련한 인물이다. 서익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자는 군수(君受), 호는 만죽(萬竹) 또는 만죽헌(萬竹軒)이다. 1542년 태어나 1569년 처음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던 중 1585년 의주 목사 재직 당시 정여립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