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강경 지역에서 개항 이후에 건립된 건축물. 1910년 한일합방이 되어 우리 땅이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일제는 건축 식민화를 본격화하였다. 1916년에는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설립하여 우리 건축가를 일부 양성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에는 모더니즘 양식, 곧 근대주의 건물이 개별적인 형태로 세워지기 시작했으나 일제 밑에서 교육을 받은 우리 건축가들은 그들의 식민화 건축 활동...
18세기 강경은 옥녀봉의 동남면에 중심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었고, 시가지 깊숙이 곡류하는 강경천을 이용한 수운교역이 활발하였다. 인구의 증가와 시장의 활성화에 따른 취락의 확장은 옥녀봉 동쪽 습지를 매립하여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주요 교통, 운송수단이 주로 수운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도로 개설은 미비하였다. 도로망은 현재의 서창리에서 홍교리 사이에 1간 폭의 도로가 있었다. 시가지...
원산과 함께 전국 2대 포구, 평양, 대구와 함께 3대 시장의 신화를 간직한 강경은 근대시기의 역사의 흔적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에 근대사 관련 유적들이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려 안타까움이 많다. 강경의 근대건축물은 19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강경천의 호안공사가 완료되면서 세워지기 시작했다. 시가지에는 상업도시 구조에 적합한 각종...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은진현(恩津縣)편에 의하면 예전의 강경포는 강경산 아래 있는 해진(海津)이며, 강경산 봉수는 전라도 용안현(龍安縣) 광두원산(廣頭院山)에 응하고, 북으로는 황화산(皇華山)에 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조선시대의 강경은 한양과 호남간 봉화(烽火)의 중계지였다. 17세기 초의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직후였으므로 전쟁의 피해복구...
강경시장의 역사는 17세기 말경에 열린 하시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는 시장이라기보다 민간 소유답에 휴한기를 이용하여 상품을 진열하는 정도였다. 1808년 저습지를 매립하여 입지를 확보하면서 큰 시장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그 후 인구가 늘어나면서 시가지를 조성하게 되어 상권은 더욱 넓어졌다. 상시장이 생긴 것은 지금의 북옥동 등 옥녀봉 밑의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시장을 증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