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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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묘리라는 지명은 시묘살이를 한 효자가 살았던 마을이란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시묘살이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장례를 치룬 다음 그 묘 앞에 움막을 짓고 묘를 지키는 행위를 이르는 것이다. 말이 쉽지 시묘살이는 아무리 대단한 효자라 해도 직접 실행하기 힘든 어려운 일이다. ‘충’과 ‘효’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조선시대에도 시묘살이를 한 효자에게는 국가가 직접 포상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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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봉동1리에 있는 김상훈 처 대구서씨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열녀문. 김상훈의 처 서씨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유순하고 효성스러워 동네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18세에 연무읍 봉동리의 김상훈에게 출가하였는데, 시집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백방으로 약을 써보아도 소용이 없자 서씨는 자기 손가락을 잘라 남편 입 속에 피를 흘려 넣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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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왕암리에 있는 조선 중기 절터. 봉선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추모비가 하나 서 있다. 추모비의 비문을 요약해 보면, “1587년 전북 익산 금마의 서익이 서거하니 두 아들인 서용갑과 서호갑이 아버지의 선영을 모시고 시묘를 하였는데, 근처 암자의 승려 윤씨가 효성에 감탄하여 봉선암이라 이름 지었다. 윤씨는 임종할 때 산 밑에 있는 자기 소유의 논 3두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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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융을 시조로 하고 서정수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논산시 세거 성씨. 부여서씨는 의자왕의 아들 서융(徐隆, 부여융이라고도 함)을 시조로 하고 있다. 서융은 660년(의자왕 22)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멸망한 뒤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에 끌려갔다. 당나라 고종은 서융에게 서씨의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냈다고 전한다. 이후 세계(世系)는 알 수 없으나, 서융의 원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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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중앙에 자리한 행림서원은 부여서씨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자랑거리로 조선시대 그들의 권위를 상징하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행림서원의 건립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서씨 집안에서는 1867년으로 보고 있으며 만죽헌 서익과 도애 이소(李韶, 1564~1646)를 배향하고 있다. ‘행림’이란 이름은 서원 앞에 서익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 두 그루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되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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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대 후기에 이 지역과 인연을 맺은 부여서가는 시간이 흐를수록 문중활동을 강하게 펼치며 자신들의 전통과 사회적 지위를 고양시키기 위해 다양하고도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에서도 1867년 이루어진 행림서원의 건립은 이런 그들의 노력에 가장 큰 정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유서 깊은 문중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문중사람들의 규약인 종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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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 행림서원에 있는 조선 중기 서익(徐益, 1542~1587)의 묘정비. 서익의 묘정비는 서익선생의 인품과 학문적 소양을 높이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1867년(고종 4)에 건립되었다. 가야곡면 육곡리 덕은골은 부여서씨의 집성촌이다. 덕은골은 백제 때 은진현 바깥을 다스리는 큰 고을이었는데, 부여서씨의 경우 이때부터 궁중을 드나드는 권위 있는 성씨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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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의 부여현 성씨조에는 서씨가 부여의 토성으로 기록되어 있고, 고려시대 효자 서공(徐恭)의 일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부여서씨는 고려시대에 부여현의 유력한 성씨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부여서씨가 육곡리에서는 언제부터 살았던 것일까. 후손들은 백제가 멸망할 때부터 육곡리 일대에 은거했을 것이라고 전하고 있으나, 그들의 구체적인 행적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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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연산리에 있는 조선시대 구읍취락. 연산면은 조선시대 연산현 지역으로서, 연산리는 연산현의 행정 업무를 집행하던 관아가 있던 구읍취락이다. 지금은 예전과 같은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던 읍취락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이다. 연산현은 은진, 니산, 석성과 함께 충청도 공주진(公州鎭)에 소속되어 있었고, 공주목사 관할 하의 연산현감이 있었다. 연산현은 진산군(현 충청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