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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도 감동한 효자 이경헌 씨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E030101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경윤

주곡리가 고향인 이경헌은 마을의 효자로 소문이 자자하다. 이경헌의 아버지는 그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으로 유랑을 떠난 후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가 없었던 이경헌의 고생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고 하는데, 자신의 인생을 영화로 만들어도 부족함이 없다는 그의 농담을 그저 쉽게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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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헌 씨

그는 산 밑의 오두막에 혼자 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어려서 너무나 가난했는지 학교에 갈 때도 옷을 겹겹이 덧댄 누더기 옷을 입고 다녔다고 했다.

“예전에 마을에 일꾼을 사는 것도 일을 잘하는 사람을 데려가지 아무나 안 데려가, 우리 마을에서 나처럼 일을 많이 한 사람 있는지 아무나 붙잡고 물어 봐, 없을껄?”

그는 홀어머니와 먹고 살기 위해서 정말 죽기 살기로 일을 했다. 그렇게 성장하면서 청년이 된 이경헌은 19세 되는 해(1951년 11월 22일) 산 너머 바로 옆 동네인 대촌리에서 중매로 부인을 만나 방 한 칸 오두막에 가정을 꾸렸다. 돈도 땅도 하나 가진 것 없던 그에게 사람 하나만 보고 딸을 내주었다고 하니, 그의 장인 되는 사람의 안목도 탁월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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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헌씨 부인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먹을 것도 없이 가난한 탓에 병명도 모른 채 시름시름 아파하던 어머니가 갑자기 죽음을 넘나들며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백방을 뛰어 다녀보아도 조금도 차도는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나가던 사람이 문득 혀를 차며 말했다.

"낫게 할 방법은 사람고기를 먹는 수밖에 방법이 없네.”하는 것이었다.

1분 1초가 위급한 상황에서 이 말을 들은 그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결심한 끝에 아무도 몰래 혼자 뒷마당으로 나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의 오른쪽 허벅지를 베어 투가리에 다려서 어머니께 드렸다. 그리고 곧바로 혹여나 잘못 될까 15㎞가 넘는 논산 시내에 있는 의원까지 업고 밤새 뛰어갔다.

그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한 마디의 말로 할 수 있을까...

“아픈 거? 그때 아픔을 어떻게 알어, 한시가 급한 상황에”

이경헌 씨는 허벅지 살을 베기 전에 술을 마셨다. 처음에는 겁도 나고 용기가 안 났지만 술기운을 빌려 용기를 낸 것이다. 자기가 자신의 살에 칼을 대고 베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고 아무리 효자라도 해도, 효심이 지극해도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동안의 어머니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의 상태가 좋아지더니 하루를 못 넘길 것 같았던 어머니가 그 후로 40여년을 더 살 수 있었다. 이경헌 씨는 이 사실조차도 숨기고 있었는데, 하루는 부인이 상처를 보고 깜짝 놀라 이유를 캐묻자 그때서야 사실을 털어 놓아 그 후부터 이웃을 통하여 동네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만약에 안 태어났으면 어머니의 정려가 주곡리에 세워졌을 텐데, 나 때문에 못한 것 같아서 죄송스럽지" 라고 하니 지금도 어머니에 대한 그의 마음이 대단함을 알 수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주곡리 선산에다 명당 터를 고르고 골라 묘를 썼다. 행방이 묘연했던 부친께서 일본 ‘고지현 고강군 좌천정 평야’라는 곳에서 홀로 눈을 감으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고향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라던 부친의 간절한 뜻에 따라 유골을 모셔다가 어머님과 나란히 모셨다. 살아서도 평생 못 봤는데 죽어서는 같이 계시라는 염원에서였다.

지금의 이경헌 씨는 마을의 큰 어른으로 마을사람들의 존경 대상이다. 자신의 힘으로 자수성가해서 7남매를 두었으며, 마을의 제일 큰 행사인 장승제를 주관하는 등 여러 가지 일에 관여한다. 어려운 시절 도와주었던 옛 마을 사람들에 대한 보답이라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지원을 아끼지 않는 그의 삶을 마을 사람들은 모두 존경한다.

*이경헌 씨는 2008년 7월 11일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고인(古人)이 되었다. 항상 마을 발전을 위해 애쓰며 마을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었던 그는 75세를 끝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의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을 사람들 너나 할 것 없이 한마음으로 모두가 슬퍼했으며, 지금은 고향인 주곡리의 선영에 모셔져 있다.

[정보 제공자]

이경헌(1933년생, 주곡리 주민)

양명석(1943년생, 새마을지도자)

이계천(1962년생, 주곡리 주민, 논산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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