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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제자를 거느린 숯골 ‘선생두레’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E010502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조민희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관한 ‘농협중앙회 농업박물관’에서는 「神農遺業」(신농유업)이라는 글자가 크게 쓰인 농기가 있다. 이 농기의 크기는 가로 240cm, 세로 360cm 정도이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깃대는 그 높이가 무려 15~17m에 이르렀다고 하니, 당시 농번기마다 들썩였을 두레의 규모를 상상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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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농유업기

1906년에 만들어졌다는 바로 이 농기가 다름 아닌 주곡리 마을 두레패들이 들고 다니던 ‘신농유업기’이다. 100여 년 전만 해도 주곡리 청년들은 매년 농사철마다 크고 높은 이 기를 펄럭이며 꽹과리를 치고 바쁜 농사일에 분주했었을 것이다.

두레를 기억하는 주곡리 일대 사람들은, 규모로 보나 힘으로 보나 주곡리 두레를 인근 두레 중 최고로 친다. 당시 주곡리 두레를 선생두레로 노성 읍내 1, 2리와 교촌리, 그리고 상월면 산성리와 한천2리, 한천3리 등 주변의 6개 마을을 제자마을로 둔 연합두레였으니 말이다.

두레를 할 때에는 모든 비용을 주곡리에서 부담하였는데, 두레 매다가 골병든다고 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혹시 제자마을이 아닌 다른 동네에서 두레를 오면 기를 부러뜨리고 내다버리는 등 크게 혼내주었다고 하는데, 한번은 인근 한천리에서 홍씨들이 기를 들고 들어와 큰 변을 당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두레는 일제강점기의 말기로 접어들면서 풍물 없이 두레만 메는 ‘벙어리 두레’로 겨우 이어오다가 결국은 사라지게 되었다. 두레가 없어진 뒤로는 품앗이로 김을 매게 되었는데, 이마저 점점 농사짓는 사람이 줄어들면서 공동작업도 불가능해졌다. 결국 제초제가 보급되고 더 이상 손으로 김매기를 하지 않게 되면서 두레는 완전히 없어졌다.

한편, 지난 2008년 6월, 인근 노성에서는 ‘노성두레풍장 전승보존회’가 조직되면서 전통을 복원하여 ‘노성 칠형제 두레메기 재연행사’가 개최되었다. 주곡리 마을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부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과거에 제자마을이었던 마을이 이처럼 많이 커져서 두레매기를 재연하니 재밌는 일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정보 제공자]

이방헌(1926년생, 주곡리 주민)

양명석(1943년생, 새마을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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