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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변화 속에 전통을 지켜나가는 부여서씨 후손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D020104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
시대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안경희

1400년대 후기에 이 지역과 인연을 맺은 부여서가는 시간이 흐를수록 문중활동을 강하게 펼치며 자신들의 전통과 사회적 지위를 고양시키기 위해 다양하고도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에서도 1867년 이루어진 행림서원의 건립은 이런 그들의 노력에 가장 큰 정점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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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림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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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림서원 배치 및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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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림서원

그들은 유서 깊은 문중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문중사람들의 규약인 종약(宗約)을 만든 것이었다. 족보에 의하면 1570년 만죽헌공에 의해 종약이 마련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종약이란 집안 종중이 모여 여러 가지 일과 운영에 관해 정해 놓은 약속으로 우리나라에 종약이 일반적으로 시행되었던 시기는 1700년대의 일인데 비해 이렇게 이른 시기에 운영되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부여서씨육곡리에 자리 잡아 안정된 형태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근거다.

그러나 종약 시행 시기에 대해서는 만죽헌공 서익이 1587년 죽음으로서 약간의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봉례공파는 기본적으로 친진(親盡) 즉 4대까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에 문제가 생겼을 때 종약을 만들었다고 하였으나 서익의 때까지는 아직 친진의 문제가 대두되지 않았고 그의 아들 용갑이나 운준(雲駿) 대에 필요성이 대두,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부여서씨 후손들은 만죽헌공 서익이 취규재(聚奎齋)라는 향약을 실시하였고, 문중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한 별도의 학당을 설립하였다는 것을 들어 그가 종약을 실시하였다고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종약의 필요가 절실하지 않은 시기로 보여진다. 또한 당시는 실제로 종약을 실시할 만큼 부여서씨들의 족세가 불어나지 않은 상태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종약을 실시하면서 또한 문중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문중계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 문중계는 1683년 설립된 것으로서 동족마을로 성장하는 과정에 여러 가지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 해에는 서씨 족보가 편찬되기도 하였다. 족보 역시 집안의 경제력과 후손의 응집력이 있어야만 제작이 가능한 것으로 당시 서씨가의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것이기도 하다. 족보는 분실할 것을 우려하며 여러 질을 만들어 각 집에 보관해 전하도록 하였다.

유서 깊은 양반가문으로서 문중의 발전과 영광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세월이 흐르고 사회가 변화하면서 그들 또한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이미 그들 스스로 양반이라는 권위의식을 벗어던지고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직도 양반 부여서씨 집안의 자손이라는 자신감과 자존심만은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전히 종친회를 구성하여 매년 음력 3월 보름이면 삼전리에 있는 재실에서 서익 선생을 비롯한 선조들에게 시제를 올리고 종중회의를 열어 남겨진 종중 살림을 관리하는 한편 앞으로 어떻게 부여서씨를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때에는 대략 30~40여명의 문중 사람들이 모이는데 전주와 멀게는 부산에서까지 올라와 참여하는 열성을 보인다. 15년 전인 1993년까지 선조의 묘소를 전부 돌아다니며 제사를 지냈지만 지금은 시간과 이동방법의 문제 등으로 재실에서 한꺼번에 제를 올리고 있다. 비록 옛 전통을 그대로 지키지는 못하지만 작은 변화를 통해 큰 틀을 지킬 수 있다면 작은 변화들은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 후손들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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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리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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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

시제가 끝난 후에는 참여한 모든 문중 사람들이 둘러 앉아 어떻게 종중을 이끌어 나가고 지켜나갈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 회의에서는 전년도 사업 보고와 올해 예산 보고를 하고 있다. 주로 각 선조들의 묘소 유지 및 관리, 보수 그리고 시제를 지내는데 드는 경비, 종답을 통해 거두어들인 수익 등을 보고하고 결산하며, 올해는 어떻게 이루어 갈 것이며 어떤 일들을 할 것인가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한 번도 거르지 않은 문중 시제는 부여서씨의 자랑이며 자존심이다.

[정보 제공자]

서각선(1930년생, 현 부여서씨 종친회장)

서승길(1932년생, 육곡2구 주민)

서승구(1928년생, 육곡2구 주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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