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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주의 활동이 활발했던 포구상업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C010202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염천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내수

강경읍옥녀봉 아래에 위치한 강경포구는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전국 3대 시장으로 불릴 만큼 충청권 일대를 상권으로 하는 주요 결절지이며, 수송 적환지였다. 이곳이 본격적으로 수산물시장의 역할을 한 것은 구한말 대자본을 가진 객주들의 등장부터이다.

천혜의 내륙항으로 일찍부터 수운이 발달한 강경포구는 금강 하구의 관문으로 서해에서 들어오는 각종 해산물과 교역물들이 이곳에 들어와서 전국 각지로 팔려나갔다. 조선 중기에는 제주에서 물품을 실은 배들이 강경포구로 드나들었고, 중국의 무역선들이 비단과 소금을 싣고 와서 무역을 하였다.

그 후 객주가 등장하면서 강경은 서해 수산물의 최대 시장으로 발전하여 일제가 경제수탈 전초기지로 삼으면서 최고 번성기를 맞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기간 동안 성어기에는 하루 100여 척의 배들이 포구에 들어와 생선을 산더미 같이 부렸고, 전국에서 몰려든 상인들이 하루에 2~3만 명씩 몰려와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강경포구 가 수산물 집하장으로 본격적인 역할을 시작한 것은 돈이 많은 객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구한말 수산물 유통 경로는 철저한 객주 중심제로 이들은 전국 각지의 상인들로부터 출어자금을 대어주고 잡은 고기를 판매하여 구전을 받았다. 강경 객주의 활동과 세력을 살펴보면, 강경의 객주는 184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1백여 년 동안 상권을 좌지우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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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강경포구

해방 후부터 1970년대 말경까지 강경포구에서 객주 활동을 했었던 신진상회 심희섭 사장의 말에 따르면, 일제강점기까지 강경에는 배를 10여 척씩 부리는 객주들이 20여 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객주들은 한 사람이 수십 명의 수산물 도매상인들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뱃사람들까지 부리니 자연히 수산물 시장은 객주 중심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객주들은 노동조합으로 결속되어 있었고, 고깃배들의 하역작업과 관리가 노동조합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부분의 상인이나 노무자들은 조합에 가입되어 활동하였다.

1920년대 내륙지방으로의 수산물 유통은 대부분 강경포구를 통해 전국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규모나 세력은 대단하였다. 조합원은 1조당 60~80명으로 총 10개조, 780여 명이 있었다고 한다.

1924년 서창리에 갑문시설이 완성된 후부터 일본상인들이 어업활동을 시작했고, 1935년 ‘어업보호취체규칙(漁業保護取締規則)’을 만들어 객주들을 정면으로 탄압했다. 이 규칙의 골자는 ‘어획물은 한곳에서만 판매토록 하고 해상에서 고기를 다른 배로 옮겨 싣지 못한다는 것’으로 강경과 마산에서만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어업조합을 만들어 기존 객주체계를 바꾸려고 하였다. 어획물을 위판장에서만 거래토록 한 것은 객주들로 하여금 어업조합에 소속되거나 어협의 허가를 얻도록 해서 그들의 기능을 약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일제의 조치는 조합에 가입된 객주들의 거센 반발을 일으켜 행정소송을 하고 강경의 객주들과 연결된 전국의 수산물 도매업자들에게 어업조합에서 고기를 사가지 않도록 하는 등 일제와 맞서도록 했다. 당시 어부들과 도매상인들은 객주들의 지시를 따랐고 결국 행정소송에서도 승소하여 일본인들은 강경 객주들의 위력을 빼앗지는 못했다. 이는 객주들이 노동조합으로 단결된 결과였다.

이렇게 197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객주 활동은 수협의 설립 이후 마찰이 심했다. 수협은 매장에서 해산물을 판매하도록 하였고, 객주는 자유판매업으로 선상에서 자유롭게 해산물을 판매하고, 객주 중개인이 도매상으로 활동하였는데, 수협에서는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여 막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협에 적발되어도 법적인 제재조치는 없었다. 전통적으로 객주활동을 해왔던 이들은 갑작스런 수협의 감시와 갈등으로 도계를 넘어 익산의 남촌에 배를 대고 객주활동을 계속하기도 했다.

그 후 1970년대 초까지 10여 명의 객주가 활동하면서 그런대로 명맥은 유지하였으나, 급속도로 사양길로 접어들어 1978년을 마지막으로 강경의 객주업은 막을 내렸다.

[정보 제공자]

심희섭(남, 1934년생, 염천리 주민/신진상회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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