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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2730
한자 高麗時代最大佛像-灌燭寺石造彌勒菩薩立像
영어의미역 The Great Stone Buddha Statue of Gwanchoksa Temple in Goryo Dynasty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동 254[관촉로1번길 25]지도보기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김갑동

[개설]

고려시대에는 각 지역에 걸쳐 투박하지만 거대한 불상들이 많이 조성되었다.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시대에 성행한 거대 불상을 대표하면서 동시에 현존 국내 최대의 고려시대 미륵보살상이다. 고려 전기인 968년(광종 19)에 제작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경기·충청 일대에서 특징적으로 조성되었던 토착성이 강한 불상으로, 새로운 지방적 미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고려시대에 거대 불상이 조성된 이유]

고려는 불교국가였던 만큼 많은 사찰이 조성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사찰 건축물은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등이다. 이들 사찰의 건축 양식은 모두 주심포 양식으로, 공포가 기둥 위에 하나씩 있다. 또 대부분 맞배지붕 양식을 하고 있다. 사찰 내에는 보통 탑이 세워졌는데, 고려시대의 탑은 통일신라시대와 마찬가지로 4각의 방형과 여러 층으로 구성되는 일반적인 형식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비해 층수가 늘어났다. 이와 더불어 사찰에 있어 필수적인 불상도 많이 조성되었다. 철불이 등장하였고, 일부 지역에 국한되어 분포되었던 불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거대 불상이 많이 조성되었다.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과 형식 변화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고려왕조에 들어오면서 불상에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소재 면에서 철불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철불은 9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어찌하여 철로 만든 불상이 탄생한 것일까? 그것은 후삼국시대의 전란과 관련이 있는 듯싶다. 후삼국시대에는 각 지역의 호족 세력들이 등장하여 각축을 벌이던 시기이다. 따라서 무기를 만드는 철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했다. 이러한 시기에 호족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과장하기 위해 철불을 만든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즉 자신들이 다른 지역 호족보다 훨씬 많은 철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을까.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불상의 분포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은 대체로 경주나 그 인근의 경상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경상도·경기도·충청도·강원도 등 다양한 지역에서 불상이 조성되었다. 이것은 신라시대의 신앙 경향이 귀족 중심적이었던 데 비해 고려시대에는 기층민까지 확산되었다는 것과 수도가 개경으로 옮겨진 것을 이유로 들 수 있겠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은 거대 석조불상의 제작이다. 이 점은 고려 불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충청남도 부여군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충청남도 당진군 안국사지 석불입상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작품의 수준이나 형식은 전대에 비하여 현저히 떨어졌다. 그 이유는 아마도 선종(禪宗)의 유행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즉, 불상에 대한 예배보다도 선사(禪師)의 언행을 따르고 사색하는 풍조가 일면서 불상 조각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불상 조각이 퇴보하였고 표현력도 떨어졌다.

불상 조각 쇠퇴의 또 한 가지 이유는 사원의 지나친 비대함, 승려들의 국정에 대한 지나친 관여, 몽고 침입으로 인한 라마교의 전래 등이다. 이로 인해 불교 조각은 새로운 양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고려시대 불상은 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하였으나 표현은 더욱 둔화되고 위축되었다. 삼국시대 불상에서 보이는 신비성이나 통일신라시대에 보이는 이상을 향하는 내재성은 나타나지 않는다. 눈 꼬리가 옆으로 길게 돌아가고 입은 괴상한 모습으로 변하여 세속화된 느낌을 자아내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같이 고려 불상이 보여주는 거대성과 추상성의 시원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의 개태사 삼존석불입상에서 시원을 찾을 수 있다. 이 불상은 936년 고려 태조 왕건후백제 신검 군대를 격파한 후 조성한 것으로, 전혀 인자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괴상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형식이 이후의 불상에 영향을 주어 각지에 거대 불상이 출현하였다. 이는 각 지역 호족 세력의 대소 및 동향과도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거대 불상의 대표라고도 할 수 있는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특징]

관촉사의 대형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동 254[관촉로1번길 25]에 조성되었는데, 예부터 은진미륵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유명한 불상이다. 국보 제323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광종 때 승려 혜명(慧明)이 큰 돌을 얻어서 성공적으로 완성시킨 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968년(광종 19)에 만든 것으로 경기·충청 일대에서 특징적으로 조성되었던 토착성이 강한 불상으로, 새로운 지방적 미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높이가 18.12m이나 되는 장대한 거상으로 동체에 비해서 두부(頭部)가 매우 커서 가분수 형태로 안정감이 부족하다. 비교적 원만한 느낌이 강조되는 두 손의 표현에 비하여 얼굴이나 동체(胴體)의 조각에 생동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상체·하체, 그리고 양손의 4개의 큰 돌을 이어서 만든 기둥 같은 몸체에 법의(法衣)의 주름도 간략하고 평면적이다. 머리 위에는 아주 높은 원통형 보관을 쓰고, 그 밑에는 머리카락이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거의 삼각형 모양으로 턱에 살이 많이 올라 이마가 상대적으로 더 좁게 보인다. 옆으로 길게 돌아간 눈과 넓은 코, 일자로 꽉 다문 입술 등은 인자함보다는 굳건한 장부의 모습을 느끼게 해준다. 또한 턱 선은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달리 둥근 양감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몸체는 거대한 돌을 원형으로 깎아 만든 괴석에 불과한 느낌을 주고 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은 위로 올리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도상면에서 보면 보살상 특유의 모습이 아니고, 수인도 마치 아미타불의 중품하생인을 한 것같이 보인다. 따라서 아미타불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른손에 연화가지를 들고 있고, 이마 위 머리카락의 곡선적인 표현이나 세 줄로 늘어진 머리갈래가 귀 위를 덮은 것을 보면 원래부터 보살형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어깨에서 양쪽으로 길게 늘어져 있으며 U자형의 옷주름이 몇 가닥 흘러내리고 있을 뿐 아주 단조롭다. 대좌(臺座)는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전체적으로 도식화의 경향이 흐르고 있어 비사실적이고, 섬세한 느낌은 전혀 주지 못하고 있다. 얼굴의 굳은 표정과 동체의 거대함은 마치 힘센 대장부 같은 위압감을 보여준다. 머리 위에 올려진 2층의 대형 고관(高冠) 역시 신라시대에는 유래가 없었던 새로운 도상으로, 강원도 강릉 신복사지의 공양보살상에서 보이던 보개(寶盖)들과 같이 고려 불상에 보이는 특이한 형태 중 하나이다. 이 고관이 불상을 보호한다는 목적 이외에 탑형을 나타낸다든지 혹은 어떤 다른 의미가 있었는지 현 단계로서는 알기 어렵지만, 고려적인 불상 형식의 어떤 토착적인 의미가 있었는지는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이 불상의 얼굴과 고관 사이의 부분이 거칠게 처리되어 미완성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사이에 원래 3척의 금동입상이 있었다는 보고를 참작하면 혹시 원통형금속제보관으로 둘려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중국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중국 당대에는 밀교의 융성으로 원통고관형의 보살상들이 많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당말 오대 및 송대까지 계속되었는데,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하였던 고려에서도 이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 관음상으로 표현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관촉사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18 은진현조에 보면 ‘반약산에 높이 50척의 석미륵이 있는데, 고려 광종(950~975년) 때 승려 혜명이 대석을 얻어서 성공적으로 완성시킨 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이 조선 1744년(영조 20)의 사적비에 전하는데, 968년(광종 19) 반야산 기슭에서 거석을 얻어 승려 혜명이 970년(광종 21)에서 1006년(목종 9)까지 37년에 걸쳐 완성하였고, 큰 돌을 올려놓기 위해 옆에 토담을 쌓아서 세우게 된 내력과 조선조에 이르러 개수되었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이러한 내용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좀 더 고증이 있어야겠으나 대체로 이 불상이 광종대 즉, 10세기 후반에 조성되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크기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으로 불상 예배의 외경심을 돋우어주는 신앙적인 효과도 매우 컸을 것이다. 예부터 이 은진미륵상과 관련되는 여러 민간설화와 더불어, 고려 이래로 불상이 일반 대중의 민간 신앙적인 예배대상으로도 여겨져 대부분 미륵상이라고 전칭되어 오는 경향과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현존 국내 최대의 고려조 미륵보살상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한편 관촉사 불상의 거대함에서 우러나오는 위압감은 불상이 조성될 때의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조성된 목적]

관촉사의 거대한 석조미륵보살입상은 968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왜 광종은 여기에 이처럼 거대한 불상을 조성하였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견훤의 무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견훤의 무덤은 황산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견훤 묘은진현(고려시대의 덕은군)에 있었다. 현재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해당된다.

견훤의 무덤이 여기에 위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견훤의 유언에 따랐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견훤은 왜 여기에 무덤을 써달라고 했을까? 그것은 견훤 자신이 후백제의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건국한 나라를 스스로 멸망케 한 것이다. 그런 마당에 후백제의 수도에 무덤을 써달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출생지인 상주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다. 따라서 자신이 죽은 곳에서 멀지 않으면서 자신이 세운 후백제의 수도를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무덤을 써달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남쪽을 바라보면 전라북도 김제에 있는 모악산이 보인다. 모악산 밑에는 그가 유폐되었던 금산사가 있었다. 금산사는 견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어떤 기록에는 금산사를 견훤이 창건한 절이라 할 정도이다. 그렇게 정들었던 금산사와 모악산을 죽어서라도 보고 싶어한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입장에서도 이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적국 왕의 무덤을 고려라는 새로운 제국의 수도 근처에 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귀순하여 협조한 견훤의 마지막 유언을 들어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 판단했으리라. 그러나 한편으로는 견훤의 무덤을 중심으로 후백제의 세력이 뭉칠 것을 염려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광종 대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광종은 왕권 강화책과 더불어 호족 억압책을 시행한 인물이다. 광종은 즉위 초기에는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읽으면서 나름대로 좋은 정치를 해보려고 애썼다. 또 여러 절을 창건하여 아버지와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광종은 956년(광종 7)부터 왕권의 강화에 착수하였다.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귀족들이 소유하고 있던 노비를 풀어주었다. 이는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백성들의 민심을 얻는 이중의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958년(광종 9)에는 무인공신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신하들을 뽑기 위해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또 960년(광종 11)에는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여 신하들의 서열체계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개경을 황도(皇都)라 명명하였다. 황제가 거주하고 있는 수도란 뜻이다.

이후부터 그는 호족들을 숙청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준홍(俊弘)과 왕동(王同) 등이 모반했다 하여 이들을 귀양 보낸 것을 시발로 하여 많은 호족들을 숙청하였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뜻을 얻어 어질고 충성스런 사람을 모함하니, 종이 그 상전을 고소하고 자식이 그 아비를 참소하매 감옥이 항상 가득 차 있었으므로 임시 감옥을 설치하였으며, 죄 없이 죽임을 당하는 자가 줄을 잇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광종은 968년(광종 19)에 이르러서는 홍화사·유암사·삼귀사 등의 절을 짓고 여러 곳에 방생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또 승려 혜거(惠居, ?~974)를 국사(國師)로 삼고 탄문(坦文, 900~975)으로 왕사(王師)를 삼았다. 왕이 참소를 믿고 사람을 많이 죽였으므로 불교의 힘을 빌어 죄업을 씻고자 함이었다. 정책도 강압정책에서 유화정책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은진 관촉사의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의 높이는 54척이나 되는 거대한 것이다. 그렇게 거대한 불상을 세운 것은 이 지역 민심을 무마함과 더불어 고려 조정의 위압적인 형상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양식을 보더라도 개태사의 좌협시보살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개태사 좌협시보살상의 투박하고 둔중한 형태에서 오는 불균형감, 전체적으로 신비함 없이 괴량감(塊量感)만을 강조한 양식, 세속적인 인간화가 더욱 짙고, 도식적이며 추상성까지도 보이는 불상의 특성들이 관촉사의 석조미륵보살입상에서는 더욱 단순화 내지는 추상화되어 나타났다. 개태사와 마찬가지로 고려 왕실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는 바로 관촉사의 창건과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조성이 개태사 창건의 의도와 맥을 같이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5.09 문화재지정번호 수정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보물 제218호 -> 국보 제323호
이용자 의견
최** 금산사에는 불과 한 달 있었고 갇혀 있었는데 정이 들었다는 것은 어불성설... . 2018.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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