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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의 백제 고분군과 출토 유물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2729
한자 論山-百濟古墳群-出土遺物
영어의미역 Baekje Tumuli and Excavated Artifacts of Nonsan Cit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이남석

[개설]

백제웅진 천도로 논산 지역이 차지하는 사회·문화적 역할이 증대되면서 충청남도 논산시 일원에는 많은 백제시대 고분군과 생활유적이 조성되었다. 특히 고분 문화는 당대의 장송 의례에 따른 문화 성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에, 논산 지역 백제 고분군과 출토유물을 검토하면 백제의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나누어 살필 수 있다.

백제시대 논산 지역은 3개 행정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 나타난 백제시대 논산 지역과 관련된 행정구역을 보면 남부 지역은 덕근군, 동부 지역은 황등야산군, 북부 지역은 웅진의 열야산현에 편제되어 있었다.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개 백제의 지방 체제가 새롭게 정비되는 ‘사비기’로 판단된다.

고대 국가 백제와 논산과의 관계는 백제의 태동과 더불어 시작되었을 것인즉, 초기에는 배후 지역으로 존재하였고, 백제의 팽창과 더불어 중요 지역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백제웅진으로 천도함으로써 공주를 중심으로 역사가 전개되었고, 이때부터 논산 지역이 명실상부한 백제의 중요 지역으로 발돋움하였다. 특히 사비 천도 후 황산벌 전투에 이르기까지 신라를 비롯한 남부 지역 교통로로서의 입지가 강조되면서, 논산은 진정한 백제문화의 터전으로 자리하였다.

[논산 지역 백제 고분군 현황]

기존에 논산에서 조사된 백제 고분군은 총 18지점에 해당한다. 고분군의 존재는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를 통하여 확인되었는데, 연산면 표정리 고분군양촌면 모촌리 고분군, 그리고 가야곡면 육곡리 고분군만 발굴조사된 자료이다. 지역별로는 성동면 1곳, 광석면 1곳, 노성면 3곳, 상월면 3곳, 연산면 6곳, 양촌면 3곳, 가야곡면 1곳 등에 분포되어 있다.

확인된 고분군의 수량이 많지는 않으나 전체적으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다만 특징적인 것은 노성·상월·연산면을 포함하는 동북부 지역과 양촌면가야곡면 일대의 동남부 지역에 고분군의 분포가 밀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논산 지역에서 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백제 고분의 형태는 수혈식 석곽묘가 주를 이루고 일부 횡혈식 석실분과 옹관묘가 확인된다.

[논산 지역 백제 고분 문화의 특징]

백제 묘제는 유형이 다양하다는 특징이 있다. 중앙의 지배 세력과 지방 재지 세력의 묘제가 서로 다른 것처럼, 다양한 묘제 유형은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사용주체들이 조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다양한 묘제들은 대부분 횡혈식 석실분으로 일원화되는데, 이는 사회발전과 병행하여 나타나기에 묘제 변화는 사회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백제 고분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양촌면 모촌리 고분군 1·2, 연산면 표정리 도구머리·당골·하표정 고분군, 그리고 가야곡면 육곡리 고분군이다. 비교적 여러 차례에 걸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조사된 고분 가운데 가야곡면 육곡리 고분군만 횡혈식 석실분이고, 나머지는 거의 수혈식 석곽묘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수혈식 석곽묘의 경우 백제 중앙과는 별도로 독자적인 재지적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지방 묘제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백제웅진 천도 이전부터 조영된 것으로 판단되는 점이다. 이는 수혈식 석곽묘를 중심으로 하는 재지 세력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는 자료이며, 이후 고분 문화의 변화과정에서 중앙과의 관계를 추론할 수 있기도 하다.

반면 횡혈식 석실분은 웅진 천도 이후 사비 도읍기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백제 고분 문화로서, 발굴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가야곡면 육곡리 고분군에서는 사비 도읍기의 고임식 천장을 갖춘 횡혈식 석실분의 전형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논산 지역 백제 고분 문화의 전개는 수혈식 석곽묘를 중심으로 한 재지 세력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웅진 천도 후 횡혈식 석실분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 중앙 세력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변화·발전하는 모습으로 정리될 수 있다.

[논산 지역 백제 고분 문화를 통해 본 중앙과 지방의 관계]

1. 수혈식 석곽묘를 통한 고찰

고분이라는 물적 자료가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4세기 말이나 5세기 중반까지 백제의 도읍이 위치한 한강의 중하류 지역에서는 적석총이 사용되었고, 반면에 지방은 토광묘나 옹관묘, 수혈식 석곽묘와 같은 적석총과는 이질적인 묘제가 사용되었다. 수혈식 석곽묘제는 대체로 4세기대부터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반까지 사용되었는데, 고분의 분포는 금강 유역을 중심으로 중서부 지역에 집중되어 있고, 보다 북쪽에서 산발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논산 지역의 백제시대 고분 가운데 양촌면 모촌리 고분군연산면 표정리 고분군은 수혈식 석곽묘와 수혈식 석실분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석곽묘는 무덤 구덩이를 파고 석축으로 묘실을 만들지만, 출입 시설이 전혀 마련되지 않는 묘제이다. 수혈식 석곽묘의 등장배경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기는 어렵지만, 지금까지 확인된 자료가 3세기 말경보다 이른 것이 없기에 오히려 외부에서 유입된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논산 지역에서 확인되는 수혈식 석곽묘는 백제 중앙의 횡혈식 석실분과는 구별되는 독자성을 유지한 묘제로, 지방의 정치·사회적 독자성을 암시하는 증거로 여겨진다. 특히 논산 모촌리 고분군 93-5호 수혈식 석곽묘는 묘실 규모가 보통의 백제 수혈식 석곽묘에 비해 2배 정도 큰 대형 묘에 속한다. 구조는 전형적인 수혈식 석곽묘인데, 묘실 내부에 시상대(屍床臺)가 마련되어 있고, 시상대의 전·후에 부장품을 넣는 부곽(副槨)도 설치되어 있다. 이 무덤의 축조 시기는 대체로 5세기 최말기경으로 편년된다. 93-5호 석곽묘의 묘실 내 부장품은 상·하의 2개 층위로 구분되고, 이들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물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93-5호 석곽묘의 유물 중에 하층의 것은 수혈식 석곽묘에 관행적으로 부장되는 물품으로, 원저 광구호나 기대 등과 같은 토기와 마구, 은제환두대도 등의 철기류이다. 이들은 처음 묘실을 조성하면서 안치된 것으로, 부장품을 넣기 위해 만든 부곽에 매납된 채 있었다. 반면에 상층 유물은 묘실 중앙에 설치된 시상대 좌우에, 그것도 시상대와 동일한 높이로 개배(蓋杯)와 병형토기(甁形土器)가 있었다.

그런데 개배나 병형토기는 수혈식 석곽묘보다는 오히려 횡혈식 석실분에 부장되던 유물들이다. 이들 유물이 수혈식 석곽묘에 부장된 예는 주로 횡혈식 석실분과 문화적 접촉이 이루어진 후에 있었다. 그런데 이들 이질적인 물품들이 동일 묘실 내에 층위를 달리하여 추가로 매납된 상태로 있었다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특수한 상황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수혈식 석곽묘에 주로 매납되는 재지계 토기 관련유물과 은제환두대도 등을 통하여 재지의 토착사회에 일정 정도 지배력을 갖춘 수장층이 존재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또한 개배와 병형토기와 같이 중앙묘제에 상징적으로 부장된 유물의 존재를 기초로 중앙과 지방과의 관계를 추론할 수 있다. 즉, 중앙 정치 세력에 의한 지방의 일원적 지배체계가 미비한 상태에서 논산 지역의 지방사회는 나름의 독자성을 영위하였고, 중앙의 지방사회 장악은 논산 모촌리 고분군 93-5호 피장자와 같은 재지의 상층인, 다시 말하면 수장층을 통해서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연산면 표정리 고분군도구머리·당골·하표정 고분군 일대가 모두 수혈식 석곽묘가 주종을 이루고 있지만, 일부 횡혈식 석실분이 함께 조사된다. 특히 하표정 16호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6세기 초반대까지 편년이 가능한 것이어서, 수혈식 석곽묘를 사용하던 논산 지역 재지 세력이 백제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이다.

수혈식 석곽묘군 내에 존재하는 횡혈식 석실분의 존재도 주목된다. 논산 모촌리 고분군(1) 지역과 표정리 고분군 내에는 대부분 수혈식 석곽묘로 이루어져 있는 지역에 횡혈식 석실분이 유입되어 있다. 또 가야곡면 육곡리에는 백제의 전형적인 고임식 천장을 갖춘 횡혈식 석실분으로 이루어진 고분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수혈식 석곽묘군에서 확인되는 횡혈식 석실분에서도 앞서 모촌리 93-5호분과 같이 재지계의 유물과 중앙의 유물이 함께 부장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통하여 백세시대 웅진·사비 도읍기의 논산 지역 재지 세력과 백제 중앙 세력의 관계를 살필 수 있다.

2. 횡혈식 석실분을 통한 고찰

백제의 횡혈식 석실분은 4세기 중·후반에 도입되어 점차 백제 중앙의 주묘제로 자리하였고, 이후 다양한 변화를 보이면서 발전하였다. 산지 입지나 남향의 경사면을 선호하는 선지관념, 매장부를 지하에 조성하는 특징, 장축방향이 방위관념보다는 축조환경 및 선지사상에 따른 축조의 편의에 좌우되는 특징, 매장부가 단실묘로서 공동의 묘실에 입구가 설치된다는 기본적 구조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묘실의 평면구조와 천정구조, 입구의 형태, 연도가 시설된 위치 및 규모, 축조재료는 상호 유기적 관계 아래 변화되면서 개별요소가 규칙적으로 결합되는 특징이 있다.

논산 가야곡면 육곡리 고분군에서 조사된 고임식의 횡혈식 석실분은 묘실의 천정이 평천정으로 조성된 것이나, 벽체의 상단에 안으로 경사를 둔 고임석을 올린 다음 수평의 평천정을 구성한 것이다. 재료는 판석 형태의 대석을 사용한 것이 많으며, 묘실의 평면은 대부분 장방형이지만 세장방형도 적지 않다. 묘실 입구는 문틀식이 많으며, 연도는 중앙식으로 단연도가 지배적이다.

육곡리 고분군은 백제시대 후기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던 공주·부여와는 대체로 40~50㎞의 거리를 두고 있다. 조사된 13기의 고분 가운데 12기가 횡혈식 석실분으로 단면 육각형의 고임식과 사각형의 평천정, 터널형의 고분이 확인되었는데, 대부분 단면 육각형이다. 입구 및 연도는 남벽에 설치하고 있다. 조사된 고분군 가운데 도굴되지 않고 원상태로 남아 있는 고분에서도 별다른 유물이 출토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백제시대 후기 박장의 풍습을 알 수 있으며, 장제에 대한 이해까지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장제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6호분에서 2개체분의 인골이, 7호분에서는 3개체분의 인골이 출토된 것이다. 이는 합장(合葬) 이외에 추가장이 있었다는 다장(多葬)을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다. 논산 지역에서 많이 출토된 수혈식 석곽묘의 단장(單葬)과는 차별화되는 것으로, 장법의 차이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육곡리 고분군 내부 출토유물은 시신을 안치하는 묘실 내에 함께 부장하였는데, 단경호(短頸壺)·병형토기·유개사이부호(有蓋四耳附壺)·개배·발형토기(鉢形土器) 등이 있다. 장신구는 금동제 귀고리와 은화관식이 있는데, 귀고리는 소환형의 세환식(細鐶式) 귀고리이다.

주목되는 유물은 7호 횡혈식 석실분에서 출토된 은화관식으로, 두께 0.06㎝의 은판 가운데를 접어 꽃봉오리와 줄기 모양이 나도록 오려서 만든 은화관식이다. 전체 형태는 중앙 상단부의 꽃봉오리, 줄기, 곁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 육곡리 7호분 출토 은화관식은 곁가지 없이 중심 줄기를 기준으로 중앙의 꽃봉오리와 좌우 각각 2개의 꽃봉오리를 포함하여 모두 5개의 꽃봉오리가 있다. 줄기의 끝부분은 모자의 정면 테두리에 꽂히는 부분이다. 기본 줄기는 하단에서 7㎝의 높이에 돌기를 두고 있다.

『삼국사기』와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隋書)』 등에 따르면 은화관식은 6품인 나솔(奈率) 이상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관등에 따라 곁가지와 꽃봉오리 수에서 차이를 보이며, 대체로 6~7세기 백제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다. 지금까지 출토된 은화관식은 부여 하황리, 논산 육곡리, 남원 척문리, 나주 흥덕리, 나주 복암리 3호(2점), 부여 능산리 36호(2점), 부여 염창리 등지에서였다. 대부분 가공된 판석을 주요 석재로 축조한 단면 6각형 고임식의 횡혈식 석실분에서 출토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은화관식은 백제의 지방 통치와 관련된 직접적인 자료로서 주목된다. 또한 은화관식이 출토된 육곡리 고분군은 전형적인 백제 횡혈식 석실분의 구조를 보이는 것으로, 이러한 유물의 존재와 고분의 형태로 미루어 볼 때 이 지역은 백제의 중앙집권적 통치질서에 편입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논산 지역 백제 고분 문화의 이원성]

논산 지역이 백제의 직접적인 통치체제 아래 편제된 것은 도읍이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475년 이후부터로 볼 수 있다. 고고학 자료 가운데 성동면 정지리원북리 등에서 조사된 백제 유적에서는 백제의 대표적인 중앙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삼족토기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또 재지 세력의 무덤으로 판단되는 양촌면 모촌리 고분군에서는 재지 수장급의 무덤에 해당하는 5호 수혈식 석곽묘 한쪽에 백제 중앙 양식의 병형토기와 개배 등이 부장되어 있다. 이는 논산 지역이 백제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기록을 통해 논산 지역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묘제를 중심으로 백제 사회를 살펴볼 경우 전기의 한성백제 중앙 세력은 적석총을 그들의 주묘제로 사용했지만, 지방의 토착사회는 나름의 독자적 고분 문화를 영위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고분 문화는 중앙과 지방 간 이원적 상황으로 존재하였다고 판단된다. 나아가 이러한 고분 문화의 이원성은 사회구성의 이원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정치·사회 환경에의 구체적 적용에는 어려움이 있다. 다만 5세기대까지 지방사회가 묘제의 독자성을 유지하였고, 나아가 논산 모촌리 93-5호분의 잔존 형상과 같은 묘제 환경을 고려하면 중앙 세력에 의한 지방의 통제는 간접 지배라는 환경이 상당기간 지속된 것으로 추론된다.

논산은 왕도인 공주나 부여와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부 지역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교통로였다. 또한 연산에서 양촌으로 연결되는 평야 지대는 옥천이나 금산을 통해 신라와도 교류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중요성과 왕도였던 공주·부여와의 근접성으로 인하여 논산 일대는 백제 중앙의 직접통치에 놓여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웅진 시기에 논산 지역은 중앙의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어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에 의해 다스려졌을 것이다. 이러한 증거는 논산 가야곡면 육곡리에서 발굴조사된 고분군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육곡리 고분군 출토 은화관식의 존재를 기초로 백제의 중앙집권적 통치 질서에 편입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논산 지역의 인문·지리적 환경은 한성백제의 배후 세력으로, 웅진·사비 도읍기 백제의 중심 세력으로 존재를 인지할 수 있다. 특히 백제 수혈식 석곽묘를 통해 살필 수 있는 재지 세력의 존재와, 이후 횡혈식 석실분을 중심으로 중앙 지배 세력의 존재 등을 파악하는 데 매우 유용한 고분 문화가 전개되어 있다.

현재 논산 지역에 알려져 있는 18개 지점의 백제 고분군 가운데 가야곡면 육곡리양촌면 모촌리, 연산면 표정리의 7개 지점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지표조사를 통해서 존재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특히 상당수의 고분은 이미 도굴로 인하여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고, 일부 확인되지 않은 고분군의 존재 가능성 또한 매우 높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체계적인 조사계획을 기초로 정밀한 조사와 더불어 관리가 이루어져야 될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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