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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2352
한자 堤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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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은지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 있던 농업 생산력 증대를 위한 수리 시설.

[개설]

『고려사(高麗史)』의 명종 18년(1182) 3월조에 기록된, “때에 맞추어 농사를 권장하고 힘써 제언(堤堰)을 수축하여 저수(貯水)하고 물을 대게 하여 황모지(荒耗地)가 없도록 하여 백성들의 먹을거리를 풍족하게 하라.”는 내용을 보면 제언 축조의 중요성을 쉽게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인 16세기 이후 수리농법인 이앙법이 확대되자 둑·제방·저수지 개발 등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농경 지역이 평야 저지대로 확산되었다. 특히 가뭄에 의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제언을 건설하는 정책을 폈다. 재지사족의 대부분은 이와 같은 농지 확대와 농산물의 증가를 경제적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농지의 확대 과정에서 그를 주도한 촌락이나 세력은 이후 관련된 촌락운영에 지배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변천]

읍지류에 기록된 논산 지역의 제언은 부가된 관개시설의 마련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후기 논산 지역의 제언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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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논산 지역 제언

조선 후기의 여러 사료를 비교해 보면 『해동지도(海東地圖)』에는 연산과 노성은 제언이 표시되어 있지 않고, 은진현에만 15개의 제언이 표시되어 있다. 은진의 경우 『해동지도』와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비교해 보면 그 수가 15개에서 16개로 1개의 제언이 증가하였다. 연산현노성현은 『여지도서』와 『충청도읍지』를 비교해 보면 연산현이 7개에서 8개로 1개의 제언이, 노성현은 24개에서 27개로 3개의 제언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기록의 변화는 관개 시설이 활발하게 축조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며, 또한 농경지가 평야 저지대로 확산되고 집약농법이 발달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입지조건]

제언과 보·저수지의 축조와 관련하여 경작지의 확대나 촌락입지의 조건을 살펴보면, 입지조건에 따라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거주면의 해발고도가 점차 낮아지면서 농지가 저지대와 평야 지대로 확대된다. 동시에 이전에 비하여 수십 배에 달하는 농토가 마련되었다.

농지의 확대는 농업인구의 증가와 이들이 거주하는 마을이 형성되는 것을 보여준다. 논산 지역의 경우 노성천, 강경천, 벌곡천, 연산천 등이 좋은 조건을 형성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과정은 1900년대에 이르면서 금강변에 접한 광석면, 성동면, 채운면 지역으로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한 사족들의 이거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많은 노동력과 경제력,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배경으로 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농토의 확대를 꾀하게 된다. 이후 대부분 동족마을로 발전하는데, 많은 동족마을이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

농지의 확대를 통해 경제적 부를 소유하게 된 사족들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배경으로 중심 촌락에 거주하면서 지연 및 경제공동체로서 공존하였으며, 신분적·경제적으로 보다 하위에 있던 주변의 자연촌들을 통할하고 있었다. 즉 지연공동체로서 수개의 자연촌락들이 하나의 체계 속에 묶여 있었으며, 대표되는 동이 이들 전체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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