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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0709
한자 夫人堂山祭
영어의미역 Buin-ri Shrine's Ritual
이칭/별칭 당할머니 제사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부인2리 지밭마을
집필자 강성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간신앙|마을 제사
의례시기/일시 음력 1월 14일 자시
의례장소 부인2리 앞 부인당지도보기
신당/신체 와옥 단칸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부인2리 지밭마을에서 매년 음력 정월 14일 왕건을 도운 무녀를 기려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부인 당산제는 왕건을 도와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데 조력한 무당을 산신으로 신격화한 독특한 사례이다. 이 마을 산제의 역사는 분명치 않지만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관련 설화가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더욱이 그 의례 및 부인당에 수반되는 엄격한 금기와 재계(齋戒), 농기걸기, 마짐시루 등의 요소는 논산의 지역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연원 및 변천]

부인 당산제는 전형적인 새해맞이 정월 대보름 동제(洞祭)의 성격을 띤다. 지금은 비록 한 마을의 동제로 축소되었지만, 예전에는 지밭을 중심으로 섶바니(부인1리), 새터(부인3리), 합천이(논산시 덕지동), 왕덕리(논산시 덕지동) 등 주변에 위치한 여러 마을이 참여했던 대규모 산제였다. 부인 당산제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지도서』 연산현 고적조에 상세한 기록이 전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전(祭田)은 부인처면에 있다. 고려 태조견훤을 정벌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본읍에 머무를 때 홀연히 꿈을 꾸었는데, 삼목(三木)을 등에 짊어지고 머리에는 큰 솥을 이고 깊은 물에 빠지는 꿈이었다. 깨어나서 매우 나쁘다고 여겨 점을 잘 치는 노파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서 친히 물어보고자 하였다. 그런데 태조가 도착하기 전에 노파는 일이 있어 외출하면서 자신의 딸에게 당부하기를, “오늘 늦게 집으로 귀인이 올 것이니 너는 그 분을 머무르게 해서 기다리게만 하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말을 많이 하지 말거라.”고 하였다.

늦은 시간에 과연 고려 태조가 와서 꿈에 대해 묻자 딸이 “불길합니다.”라고 대답하니, 태조가 좋지 않은 마음으로 가버렸다. 잠시 뒤 노파가 돌아와서 딸에게 물으니 딸이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노파가 크게 놀라면서 몇 리나 갔겠느냐고 물으니, 딸이 방금 떠났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노파는 딸로 하여금 급히 뒤쫓아가서 모셔오라 이르고, 다시 점괘를 풀어서 말하기를 “크게 길할 조짐입니다. 무릇 삼목을 등에 진 것은 임금왕자를 이룸이요, 큰 솥을 머리에 인 것은 면류관을 쓴 것이요, 깊은 물에 들어간 것은 용왕을 본 것입니다.”라고 했다.

고려 태조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과연 그대 말과 같이 된다면 내가 그대의 공을 잊지 않을 것이오.”라고 했다. 며칠 뒤에 과연 대승을 거둔 태조는 노파의 말을 생각하여 노파를 ‘부인’으로 봉하고, 또 그 거처하는 주변에 밭을 하사하여 식읍으로 삼게 했다. 노파가 죽자 동네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이로 인해 하사한 밭이 제전이 된 까닭에 그 면의 이름을 ‘부인처’라 하고 마을 이름을 ‘제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祭田在夫人處面 麗祖征甄萱 師次本邑忽夢 身負三木 頭載大鼎 陷入深淵 覺而惡之 聞有一老嫗善推占 親往問之 未至 老嫗以事將出 戒其女曰 今晩當有貴人 來到汝須留之 待我歸無多談也 及晩麗祖果到 訊之以夢 女言不吉 麗太祖不豫而去 少頃嫗還 問其女 女具言其事 嫗驚曰 度其行幾里 曰纔去未遠也 遂使 女追及請還 更布卦言 其兆曰大吉 盖負三木者成王字也 載大鼎者着冕冠也 入深淵者見龍王也 麗祖大 曰 果若汝言 吾不忘汝也 後數日果大捷 麗祖思嫗言 封嫗爲夫人 且環其所居而賜之田食邑 嫗死里人立祠 以祭之 因以其所賜田爲祭田 故其坊名夫人處 其里名曰祭田)

[신당/신체의 형태]

부인당, 즉 산제당은 부인리 지밭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들판에 위치한다. 본래 부인당이 자리한 곳은 야트막한 구릉이었으며 주위에는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었다. 당집은 와옥 단칸으로 건축되었으며, 크기는 건평이 4평 남짓한 규모이다. 이 당집을 보수하기 이전의 상량문에는 소화 6년이라고 씌어 있어 1941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집 내부는 주벽에 부인당의 유래와 축문이 기록된 액자가 걸려 있고 그 밑에 설치된 제상 위에는 ‘부인영신(夫人靈神)’이라 쓴 신위가 놓여 있다. 일제 말기까지도 주벽에는 ‘조영부인영신(窕英夫人靈神)’이라 묵서한 편액이 자리했고, 그 우측 상단에는 부인당 유래기 현판이, 좌측에는 헌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이 걸려 있었다.

무녀를 당할머니로 모신 부인당은 마을에서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신앙되었다. 따라서 평소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며, 특히 부정한 사람이나 산모 등의 접근을 매우 금기시했다. 그런 연유로 80여 년을 살아온 노인들도 지금까지 부인 당산제를 한 번도 구경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들을 수 있다.

[절차]

부인 당산제는 매년 정월 14일 자시에 거행된다. 이를 위해 정월 초삼일 무렵에 부정하지 않은 다복한 노인 중에서 생기복덕(生氣福德)을 보아 제관을 뽑는다. 제관은 흔히 ‘산제 잡숫는 사람’ 또는 ‘유사(有司)’라고 부르는데, 으레 부부가 함께 선정되어 제를 주관한다. 반면에 축관은 마을에서 한문에 능한 사람이 맡는다.

부인 당산제는 유교식 기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그 순서는 분향-강신-헌작-독축-헌작-첨작 등으로 진행하되, 헌작은 술 대신 식혜를 쓴다. 맨 마지막 절차로 소지를 올리는데, 특이하게 부인 당산제에서는 대통령을 위시하여 도지사-논산시장-면장-이장-새마을지도자 순으로 불사른다.

이어서 고사덕담으로 각 가정의 대주소지 및 이웃마을 이장과 유지들의 소지를 한 장씩 올려준다. 다만 상중인 사람은 부정하다 하여 제외된다. 옛날에는 5개 마을이 합동으로 산제를 모셨기 때문에 이들 동네의 대주소지도 모두 올려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수백 장의 소지를 일일이 불사르는 까닭에 새벽이 되어야 산제를 마칠 수 있었다.

한편 부인 당산제를 지내는 날 각 가정에서는 마중시루(마짐시루)를 올린다. 즉 제관이 지게에 제물을 지고 부인당으로 향할 때 징잡이는 힘차게 징을 울리면서 간다. 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잠시 뒤에 산제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이다. 이 소리를 듣고 개별적으로 치성을 드리는 집에서는 ‘마짐시루’를 안치한다. 또한 메가 다 되어 제상에 진설되면 다시 한 번 징을 울린다. 이는 각 가정에서도 마짐시루를 떼어 당산(장독대)으로 옮기고 치성을 드리라는 신호이다.

[축문]

부인 당산제의 축문은 고 홍사준이 1954년에 작성된 내용을 1976년 『논산군지』 고적편에 소개한 것이다. 한문으로 된 축문은 당시 필자가 한글로 된 것을 임의로 기입한 것이기 때문에 본래 의미와는 다소 상이할 수도 있다.

“유세차간지정월간지○○삭○○○감소고우 조영부인영신 숙저궐영 유구유문 유감필임 유인경복 유신유의 여지조야 신기경사 부모재상 만수무강 처을재하 백복래형 가내우해 신기제근 의외흉액 신기소멸 금운애호 가불간피 공송출입 신무흉해 이제식이 원이강복 당사구복 복녹길창 자택길일 채고미성 유신강복 검아경복 백사여의 신감유사 사신무석 근이헌주 백반지찬 유신사향(維歲次干支正月干支○○日干支○○○敢昭告于 英夫人靈神 宿諸闕迎 悠久悠問 有感必臨 唯人慶福 唯神留意 與之助耶 新起慶事 父母在上 萬壽無疆 妻蘖在下 百福來亨 家內憂害 神奇除根 意外凶厄 神奇消滅 今運愛護 可不間避 恭送出入 身無凶害 以除息耳 願以降福 堂舍求福 福祿吉昌 玆擇吉日 菜苦未誠 維神降福 檢我慶福 所求財得 百事如意 神監有賜 捨身無惜 謹以獻酒 白飯之饌 唯神 尙 饗).”

[부대행사]

소지를 끝으로 부인 당산제가 마무리되면 징을 쳐서 주민들에게 알린다. 유사와 축관은 즉석에서 간단하게 음복을 하고 제상에 올렸던 제물은 시냇물에 띄워 보낸다. 그것은 산제를 지낸 음식을 먹은 사람은 반드시 화를 당한다는 속설이 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산제를 마치면 풍물패들이 마중을 나와 길군악을 울리며 마을로 돌아온다.

이튿날 정월 대보름에는 아침부터 가가호호를 돌며 지신밟기로 축원을 해준다. 이때 풍물패가 집안으로 들어서면 뒤꼍 당산으로 가서 장독굿을 친 다음 부엌(조왕굿)-마루(성주굿)-마당(마당굿)을 차례로 돌며 액운이 없기를 기원한다. 그러면 그 집에서는 푸짐하게 주안상을 차려서 대접하고 온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진종일 풍물놀이를 벌이며 흥겨운 대보름을 보낸다.

[의의와 평가]

부인 당산제는 왕건견훤이 패권을 다투었던 후삼국시대에 실존했던 무당을 산신으로 모신 보기 드문 사례이다. 따라서 시공을 초월하여 1,000년의 장구한 세월을 이어온 산제라는 점에서 논산 지역의 향토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리라 생각된다.

부인 당산제의 유래 전설은 그 중심지인 논산시 부적면 부인리를 비롯, 인접한 노성면과 논산시, 그리고 연산면 천호리왕건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지역에 폭넓게 분포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 까닭은 후삼국기의 논산 지역이 후백제의 수도권 방위를 위한 요충지인데다 종말을 고한 최후의 격전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민족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장소였기에 왕건과 무녀의 일화는 극적인 서사 구조를 갖춘 유력한 전설로 형상화될 수 있었다. 동시에 부인당 전설은 무녀의 신격을 더욱 강화시켜 혹독한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산제를 지속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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