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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0707
한자 扶餘徐氏
영어의미역 Buyeo Seo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세거지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집성촌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
입향시기/연도 조선 전기
성씨시조 서융
입향시조 서정수

[정의]

서융을 시조로 하고 서정수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논산시 세거 성씨.

[연원]

부여서씨의자왕의 아들 서융(徐隆, 부여융이라고도 함)을 시조로 하고 있다. 서융은 660년(의자왕 22)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멸망한 뒤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에 끌려갔다. 당나라 고종은 서융에게 서씨의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냈다고 전한다. 이후 세계(世系)는 알 수 없으나, 서융의 원손으로 고려 때 병부상서를 지낸 태원군 서존(徐存)을 1세조로 받들고 부여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입향경위]

조선 세조 때 예산현감으로 있던 서정수(徐貞壽)가 논산의 은진 지역으로 유배 왔다가 가야곡면 두월리 강청마을에 부친 서열(徐悅)의 묘를 안장하고 살았다. 그 후 자손들이 은진현에 세거하였는데, 은진의 토착 성씨였던 남양홍씨나 장수황씨, 진주강씨 등과 인척으로 연결되면서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였다.

입향 후 지역에 영향력을 가질 정도로 성장하게 된 것은 조선 중·후기에 들어서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서익(徐益, 1542~1587)이다. 그는 송강 정철, 중봉 조헌, 제봉 고경명 등 저명한 기호 유현들과 깊은 교분이 있었다. 은진현에 취규재(聚奎齋)라는 서재를 열어 후학을 양성하고, 고산(高山)에 대나무 만 그루를 심고 만죽정(萬竹亭, 세심정이라고도 함)을 지어 스스로 호를 만죽헌이라 하였다.

[현황]

2008년 기준으로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에 30여 호가 살고 있다.

[관련유적]

부여서씨의 관련유적으로는 논산시 가야곡면 두월리서정수 묘표가 있다. 묘표는 높이 120㎝, 너비 61㎝, 두께 27㎝로, 서역조가 글을 짓고 썼다. 또 가야곡면 삼전리서익의 묘소와 묘갈이 있다. 묘비는 복련형 이수를 올린 형태로, 비문은 이재가 짓고 5대손 서정덕이 써서 1672년(헌종 13)에 건립하였다.

가야곡면 산노리서익을 비롯하여 양응춘, 김문기, 김성휘 등을 모셨던 효암서원이 있다. 1867년(고종 4) 서익이 퇴위되어 6위만 모셨다가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폐철되었고, 1925년 사우를 복원하였다.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에 있는 행림서원은 1867년(고종 4) 만죽헌 서익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서익산노리의 갈산사에 배향되었다가 행림서원으로 분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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