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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인당기(輔仁堂記)
  • 작성자
    관리자
  • 작성일
    2013-11-20
  • 구분
    승인기사
한자                      輔仁堂記
영어의미역             Boindang Pavilion Record
이칭/별칭             「보인당기문」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학당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철희
 
 
 
[정의]
유몽열이 세운 보인당(輔仁堂)에 율곡 이이가 지은 기문(記文)이다.
 
[개설]
충청도 이산읍재(尼山邑宰) 유몽렬(柳夢說)이 세운 ‘보인당(輔仁堂)’이란 서당에 홍윤식(洪允軾) 노인장이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아름다운 공적을 알게 하고 싶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율곡 이이(栗谷 李珥)선생이 1566년(명종 21)이 기문(記文)을 지었다.
 
당년 8월부터 강회가 시작되어 52년간 계속되었으나 강회상황은 미상이다. 임진왜란 후 1617년(광해 9) 5월 낙향 선비들에 의하여 강회가 다시 열린다. 당시 강안(講案)에 강장 김상헌, 청강 김집, 강유사 윤황, 직일 이위(집), 독법 송국택, 집례 정온 및 동반수 윤순거, 서반수 송준길, 동조사 송시열, 서조사 김익희 등 뒷날 호서사림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대부분 망라되어 있다. 또 중도에 폐지된 것을 윤순거, 윤원거, 윤선거 선생 등이 1656(효종 7)년 보인당 동서재를 중수하고 윤순거, 윤원거 선생 등이 기숙하면서 강론한 곳이다.
 
무안박씨 마을에 보인당 후신인 옛 모곡서원 강당에 게시된 ‘보인당고사현판’에 의하면 청금록에 박종원 등 56명, 동서제생에 이필태 등 69명, 강회참원·청금과환록에 김상헌 등 52명의 명단이 있는데 후대에 대략 적은 것이라 한다. 보인당유생 관련 문건은 1652년 윤증(尹拯)이 보인당유생대표로 김상헌 제문을 지었고, 1672년 윤문거가 서거 하니 보인당유생이 제문을 올렸으며, 같은 해 송준길이 서거하니 보인당유생 박세로(朴世老)가 제문을 바친다. 또 윤증은 1702년 홍세구(洪世?) 타계시 ‘1638년 보인당에서 선진을 뵈었었고, 양정재에서 다시 구면으로 만났었네’라는 만장을 살펴보면 보인당은 이산(노성)현 동쪽 5리(동촌 학당리) 성삼문의 외손 박증(朴增) 유허 경내에 있었으나 17세기 말에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그 터로 추정되는 곳인 도룡동 번당 골짜기에 사철 마르지 않는 번당샘 하나가 맑은 식수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 ‘번당’이란 지명은 보인당이 변천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내용]
원문내용은 다음과 같다.
 
“홍윤식(洪允軾) 어른께서 이산(尼山)에서 오셔서 인사말씀을 나눈 뒤 쉴 틈도 없이 한마디 하시는데, 바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다. ‘현감 유몽열(柳夢說) 님이 고을을 다스림에 군민이 편안하도록 주력하고 선비 양성에 매우 공을 들였다. 버려진 절(廢佛院)을 고치고 지붕을 새로 수리하여 고을의 인재들이 모여서 학문하는 곳으로 만들고 그 건물의 편액을 「보인당」이라 했다. 서책을 사들이고 녹봉을 쪼개어 기금을 마련해서 여러 선비들이 비용으로 쓰도록 했다. 부처를 모시던 절이 선비의 집으로 변하게 되어 고을 사람들이 그 공적을 아름답게 여긴다. 원컨대 공의 글을 빌려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시작된 바를 알게 하고 싶다.”
“이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힘쓰는 것은 기한을 넘기지 않고 문서를 처리하는데 조심할 뿐이다. 눈앞의 작은 꼬투리 잡힐 만한 일에도 혹 염두에 두지 않거늘 하물며 학교를 세우는 것처럼 거창한 일을 하려하겠습니까? 유 사또가 이미 백성을 편안히 하는데 힘쓰고 또 학문을 일으키는데 힘쓰니 이는 힘쓸 바를 안다고 할 만 하다. 생각해보니 선비의 근심은 큰집에 살지 못한다거나 진수성찬을 먹지 못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학문에 뜻을 두지 못하는 것에 있을 뿐이다.’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두었다면 항상 ‘항상 마음을 바르게 하여 품행을 닦는다.’는 거경(居敬)과 ‘사물의 이치를 깊게 연구한다.’는 궁리(窮理), 그 두 가지 공부에 마음을 다하고 벗들과 서로 도와 학문과 품성을 닦아서 서로 지켜보며 선(善)한 행실로 나아간다면 ‘훌륭한 인덕을 닦도록 서로 격려하고 돕는다.’는 가히 보인(輔仁)이라는 이름에 합당할 것이다. 가령 학문에 뜻을 두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만을 일삼고 서로 모여서 즐겁게 놀기에만 힘을 쓴다면 건물의 편액에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유 사또의 집에 살며 유 사또 밥을 먹는 사람들은 학문에 더욱 힘써야만 할 것이다.”
 
洪丈允軾。來自尼山。敍寒暄外。不遑出一言。卽道邑宰柳侯夢說爲政。主於便民。尤致力於養士。修葺廢佛院。爲邑中俊秀藏修之所。扁其堂曰輔仁。買置書籍。分俸錢爲子母之資。以?諸生。使胡神之廟。變爲章甫之室。邑人咸嘉厥績。願借公筆。?後人知其所始。余應之曰。今之爲邑者所務。在於畏簡書赴期會而已。眼前瘡?。或莫之動念。況事學校希闊之擧乎。柳侯旣務安民。又務興學。可謂知所務矣。第士子之患。不在於居無厦屋。食無四?。只在於不志于學耳。誠志于學。則居敬窮理。兩進其功。朋友麗澤。相觀而善。可?輔仁之名矣。如使志不在學。??是事。相聚而嬉游。則能無愧於堂扁乎。居柳侯之屋。食柳侯之食者。其勖之哉。
 
[의의와 평가]
보인당은 기숙 서당으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말까지 호서사림의 배출지로 중요한 학교이었으나 알려지지 않고 단 율곡전서와 여지도서에 기문이 등재되어 있을 뿐이며, 다행히 명재유고에 다수의 기록이 전하고, 은진송씨 가승에 한줄 나타난다.
 
무안박씨 문중에는 1849년 박증실기의 건사사적기에 ‘보인당으로 인하여 문장의 고을이 되었다’고 자세히 기술되었으며, 2003년 이해준 교수는 ‘돈암서원이나 노강서원보다 2~3세대를 앞선 유서로 보인당은 호서예학의 탯줄’이요, 강성복 박사는 ‘보인당은 호서사림의 둥지’라고 단서를 말한다. 2005년 암천선생학술대회에서 윤사순 교수는 ‘박증 유허지 보인당은 호서사림파를 일으킨 씨앗구실은 한 구체적 증거임이 틀림없다’고 기조발표를 하였다. 이종성 교수는 ‘보인당은 학문적으로 기호유학의 터전을 마련하는 보금자리요, 정치적으로는 율곡과 근친성을 갖는 서인 산당의 출현배경지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담당해 내게 되었다’고 각각 논평했다.
 
이춘진은 ‘보인당은 강학의 장소로, 노성 지역 무안박씨의 사회적 지위가 성장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라고 그 의의를 적시하였다.
 
[참고문헌]
『栗谷全書(13권)』
『童土集』
『龍西集』
『石湖遺稿』
『魯西遺稿』
『明齋遺稿(4권, 33권, 43권, 44권)』
『德恩家乘(2권)』.1998.
박철희 · 강성복,『암천 박증과 모곡서원』(암천정신연구소, 2003)
『암천 박증의 도학정신과 유물 유적』(충남대학교유학연구소편, 2005)
『論山市誌(1권)』(논산시지편찬위원회, 2005)
『역주논산지리지』(논산문화원, 2005)
「디지털논산문화대전」(보인당, 무안박씨, 송시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