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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정
  • 작성자
    김**
  • 작성일
    2010-01-22
  • 구분
    승인기사
  • 분야
    종교 > 유교
  • 유형
    유적 > 건물
  •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 지역
    논산시 > 강경읍

[기본 정보]
항목명(한글)     덕유정
항목명(한자)     德游亭
항목명(영어)     Deokyujeong Ritual Archery Field
이칭·별칭          鏡湖射亭
분야1               종교/유교               분야2 문화유산/유형유산
유형1               유적/건물유형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동흥리 47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택중

[상세 정보]성격                활터
양식 
건립시기   
연도                1828년
정면칸수         
측면칸수
소재지 주소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동흥리 47 
소유자             덕유정
관리자             덕유정
문화재 지정번호 논산시 향토유적 제1호
문화재 지정일    1992년 10월 28일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동흥리에 있는 활터[射亭].

[개설]  덕유정의 정액(亭額)은 ‘활쏘기에서 덕을 행하고 기예(技藝)를 배움에서 그 뜻을 취했다[惟我亭額 取義於射觀德游於藝]’ 는 「덕유계서(德游?序)」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강경 지역에서의 향사례(鄕射禮) 행사는 예학의 산실 죽림서원(竹林書院) 강학조(講學條)에 따라 5년 연례행사로 시행했다. 이후 죽림서원 후진들은 1828년(순조 28년 무자 4월)에 고대의 제도를 계승하고 향촌 육성을 목적으로 하여 덕유계(德游?)를 세우고, 향사례와 그 뜻이 대략 같은 사체대개(射?大?) 23개항의 예문(禮文)과 덕유정 운영을 위한 43개항의 계례정식(?例定式)을 제정하여 정계(亭?)를 유지했다. 이러한 규약으로 덕유정을 이었으나 이후 시대의 변천에 따라 1963년에 회칙을 개정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변천]덕유정 건립 이전의 시대적 상황은 임진·병자호란 등 여러 차례의 국난을 거치면서 사회가 혼란하였다. 조정에서는 군신관계에서의 상하질서, 사회관계에서의 장유질서를 강조하고, 이 규범을 의식절차 안에서 구현시킬 목적으로 예학을 심화시키고 생활화시켜 사회를 안정화하는데 주력했다.
이 시기 지역한량(地域閑良)들이 죽림서원 후학이 됐고 배출된 문사(文士), 달필(達筆)들은 향촌육성을 목적하여 사계(射?)를 세우게 된다. 덕유정 제원(諸員)들은 모두 경호장보(鏡湖章甫)라는 호칭과 함께 유림(儒林)의 긍지로서 덕유정 사체대개를 세워 국가정책에 순응한 것이며 계원 상호간의 우의결속을 다지면서 계를 이은 것이다.

덕유정의 건립 연대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단지 일각에서는 1828년 작성된 덕유계의 ‘자료 1권 표지’에 “사장(射場)의 논이 원 13두락인데 그 중 3두락은 강경면 나까마찌[中町] 고 김종규(36년 전 사망)의 기부에 의한다”라는 기록에 의거하여 1793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김종규의 출생년도는 제3권 경오년 좌목(庚午年 座目: 1870년 5월 15일)에 戊辰年(1808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덕유계 표지에 있는 기록은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하다고 하겠으며, 이를 근거로 덕유정 건립 연대를 1793년으로 추정한 견해는 재고를 요한다. 

덕유정은 덕유계가 작성된 1828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덕유정 건축은 1865년 을축(乙丑) 윤(潤) 5월에 이르러 원 정사(亭舍) 위에 10간으로 개량했다. 이어 1883년 7월 21일 癸未(고종 20년)에는 옥녀봉상의 수운정(垂雲亭)을 덕유정 안으로 이축하여 관해루(觀海樓)로 개칭(改稱)하여 6간의 부속건물이 되었다. 
사정 넓이는 1098평방미터이며 대지는 332평 3두락이다.

이후 일제의 보호국이 된 을사년(1905년) 다음 병오년(1906년)에는 15년간 폐정(閉亭)되었다. 그러나 경호장보(鏡湖章甫)들은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 창씨개명 등 만행에 저항했고 또한 3.1운동 등 전 국민적인 저항에 앞장섰다. 이후 일제가 유화정책을 씀에 따라 임신년(1932년 7월) 몰수당했던 덕유정의 재산을 모두 반환받았다. 다시 교육 계몽운동으로 만동학교를 설립하여 講式 행사를 부활했고 그 외 전국 편사대회 등 사회운동의 공간으로 활용하는 등의 본래의 역할을 다시 하였다.

[현황] 덕유정은 국궁문화의 보고이며 창조적 계승에서 그 위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덕유정 소장 고문헌은 총 11권 목판 기록 5점 비석문 1점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전국에 산재한 350여 국궁장에서는 찾을 수 없는 유일기록이다. 또한 예부터 전래되는 3대 연중행사로서 선생안제(先生案祭), 사정 건축기념제(射亭建築記念祭), 고사(告祀)를 지내고 있다.

[의의와 평가] 기호유학의 구도 하에 강경지역 사회에서 연례행사로 시행되었던 향사례와 향음주례(鄕飮酒禮)는 근본 의의가 읍양(揖讓)하는 예속에 있는 것이다. 또한 활쏘기는 자기 몸에서 바른 것을 구한다는 예(禮)를 구현한 것이며 그 의식은 경호장보들이 주도했다. 이로써 덕유정에서 계승해온 예사(禮射)는 국궁문화의 원형으로서 옛 문화의 표상이며 서원·향교·사우·묘소·재실등과 함께 유교 유적임이 분명한 것이다.

[참고문헌]『죽림서원지(竹林書院誌)』
「덕유정계서, 목판기록」
이건호·한영국, 「한국 사정(射亭)의 역사와 문화」(제4회 국궁문화연구 세미나, 국궁문화연구회, 2004. 4. 3)